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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상 Mar 03. 2022

눈높이 맞추기는 답이 아니었다.

10년 전쯤 일입니다. 교양 교과목 개설과 관련하여 조언을 얻기 위해 선배 교수님을 만나 뵈었지요. 그분은 원래 물리학과 교수님이셨는데, 많은 대학에서 물리학과는 철학과와 함께 가장 먼저 폐지된 전공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물리학과가 왜 폐지되었는지 아시나?"

"음... 취업률이 낮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어려워서 그래요. 학생들이 재미없어해서 그래."


순간 벽에 머리를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습니다. 선배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물리학과는 대학 본부가 폐지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학생들로부터 외면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우리 과도 어렵고 재미없는 학문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공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할 학생도, 전공을 살려 취업할 학생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얼핏 보기에 전공에 몰입할 의지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외계어 같은 전문용어와 암호 같은 이론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변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눈높이 맞추기는 눈높이 낮추기일뿐


재미있고 흥미롭게 가르치고 싶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시중에 만화로 그려진 교재들이 간혹 나오는데, 그렇다고 쉽거나 재미있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냥 교과서 내용이 말풍선에 들어 있을 뿐이죠. 제가 유재석처럼 무슨 말을 해도 포복절도하게 할 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어쩌다 날리는 유머는 언제나 "저한테 왜 그러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수업의 수준을 낮추는 길을 걷게 되더라고요. 고등학교 수준, 중학교 수준, 이러다가 언젠가는 초등학교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수준이 낮아진다고 더 흥미를 갖거나 공부할 의욕을 갖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강의 만족도만 떨어뜨릴 뿐이었습니다.


'눈높이 맞추기'라는 말로 포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눈높이는 절대로 높아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죠. 눈높이 맞추기는 눈높이 낮추기였고,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수준 낮추기 챌린지였습니다.


향상심이 열쇠다!


공부법으로 유명한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교육력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는데, 지금까지의 저의 생각은 무의미한, 어쩌면 해로울 수 있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높이를 낮추어 쉽게 가르치겠다는 생각 자체가 선생의 오만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뭐라고 학생들의 수준을 함부로 판단하고, 학생들의 잠재력을 빼앗느냐는 말입니다.


그는 교육의 본질이 향상심을 키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수업을 통해 엄청난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시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죠. 수업을 통해 가장 많이 공부하는 사람은 선생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뭐하러 수업을 하고 또 수업을 듣느냐는 것일까요. 그는 배우고 싶은 마음, 배워서 발전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향상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생 스스로가 공부하는 기쁨, 배움에 대한 동경을 가져야 하고 그러한 진정성이 수업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업이 쉽고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배워서 발전하고 싶은 마음만 전달할 수 있다면 수업은 오히려 어려운 쪽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실제로 수업은 어려울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학문 분야에 따라 유불리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현실과 가깝고, 체감할 수 있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내용을 가진 학문이 고도로 추상화되어 있고 독자적인 개념어가 발달한 그래서 진입장벽이 높은 학문보다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유리하겠지요. 그러나 그 진입장벽을 넘을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 선생의 역할이 있고 가르침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가지 더 보태면, 일타강사일수록 수업이 쉽다는 말을 합니다. 학문이 깊은 학자일수록 이론이 명쾌해지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쉽게 가르치기 위해 고작 수준을 낮추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는 선생은 그냥 애송이 선생일 뿐입니다. 쉽게 가르치는 테크닉을 찾기 전에 스스로의 공부를 깊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눈높이 맞추기'라는 신기루를 쫓으면서 깨달은 결과를 정리하면 현재 시점에서는 이 정도입니다. 물론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겠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나침반을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흔들리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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