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인 패션>와 <퀸덤>은 어떻게 서바이벌을 바꿔놓았나
원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바이벌 특유의 자극적인 캣파이트나, 누군가를 악역으로 몰아가는 악마의 편집 같은 게 싫었다. 다 대단한 사람들인데 한 번의 실수로 굳이 승패를 가려내고, 기쁨에 겨운 승자와 눈물 흘리는 패자를 교차편집하는 그런 잔인함이 나를 질리게 했다. 세상은 이미 치열한데, 굳이 쉬고 싶어서 보는 TV에서도 그런 일을 봐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넥스트 인 패션>을 보았다. 서바이벌이라는 형태는 싫지만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 흥미가 생겼다. 유명 명품 이커머스 플랫폼인 네타포르테와 함께 제작한 만큼, 1위를 한 사람은 25만 달러(약 3억 원)를 거머쥐고 네타포르테에 자신의 브랜드를 입점시킬 수도 있다. 전세계에서 모인 18명의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분초를 다투며 이틀에 한 번씩 엄청난 옷들을 디자인부터 제작, 피팅까지 완료해냈다. 패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들으면서 하찮은 드레스를 한 벌 간신히 만들어낸 나는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물론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전문가들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물론 한국인 디자이너 김민주였지만 그 다음은 단연 다니엘 플레처였다. 영국인 출신 디자이너인 다니엘은 저명한 패션 스쿨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 후 루이비통, 버버리 등을 거쳐 현재는 브랜드 Fiorucci에서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쇼에서도 계속 우수한 성과를 거둘 정도로 대단히 실력 있는 디자이너이다.
내가 다니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가 당연히 뛰어난 디자이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쇼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가치관 때문이었다. 환경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패션으로 표현하는 것도 대단했지만, 같은 참가자들을 북돋아주고 챙겨주는 것이 멋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일하던 칼리의 감정기복을 오롯이 달래주었고, 개인전으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녀가 감정적으로 불안해할 때마다 걱정해준다. 김민주 디자이너가 불안해하는 것을 볼 때에도 그는 이렇게 말해준다. “기억해 민주, 우리는 너의 재능을 알아. 너는 우승할 수 있어.”
Remember, Minju. We see your talent.
You can win this.
이게 어떻게 서로 경쟁하는 구도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다니엘만이 아니다. <넥스트 인 패션>의 참가자들은 서로와 경쟁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챙겨주고 진심으로 조언해주며 서로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 한 번은 옷감을 걸어둔 폴대가 무너져 출연자 중 하나인 마르코 모란테가 부상을 입고 병원을 다녀온 에피소드가 있었다. 함께 2인조로 일하던 애쉬튼 히로타가 홀로 남겨지자 다른 참가자들은 그에게 도와줄 건 없는지, 괜찮은지 물어본다. 마지막 피팅 직전까지 서로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응원을 해주기도 한다.
김민주는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생각할 때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건 우리가 학생이 아니라 이미 자기 브랜드를 운영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서 하나의 옷을 만들어 내게 되거든요.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촬영 중에도 자기 브랜드에서 일하듯 자연스럽게 서로의 의견을 물어본 것 같아요."
사회 경험이 없는 상태로 경연에 출전하면 욕심이 나기도 할 텐데
저희는 이미 그런 시기를 지났거든요.
아, 얼마나 성숙한 태도인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패션 역시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봉제를 하고, 누군가가 피팅을 하고, 누군가는 그 옷을 입고 무대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각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옷들로 패션쇼를 하며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개인전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함께 일하면서 최고의 쇼, 가장 멋진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작년 하반기 엠넷에서 진행했던 <컴백전쟁 : 퀸덤>이 그랬다. 서바이벌의 프로그램을 가져와 마마무, 오마이걸, AOA, (여자)아이들처럼 이미 경력이 있는 가수들이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무대를 평가하게 하고, 점수를 매기고, 탈락하게 하는 전형적인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적나라한 부제에서부터 제작진의 의도가 읽힌다)
그렇지만 참가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걸그룹'이라는 수동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무대를 꾸미고 기획하고 최선을 다한 공연을 선보였지만, 그것은 결코 다른 팀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룰을 따르더라도 부득이하게 낮은 점수를 매긴 그룹에 진심 담긴 사과를 했고, 우승팀에는 축하를 건넸다. 동시에 기존의 안무나 무대와 색다른,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엠넷의 구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예상치 못하게 화제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을 격하게 응원해주거나 다른 그룹(러블리즈 케이와 마마무 화사처럼) 멤버들끼리 함께 무대를 꾸미면서, 경쟁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K-POP 여왕의 자리를 두고 펼쳐지는 걸그룹 컴백 전쟁!'이라는 슬로건이 낯뜨거울 만큼 훈훈한 예능이 된 퀸덤은 큰 논란 없이 다양한 시사점과 감동을 안겨주면서 6주 연속 화제성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서바이벌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런 서바이벌을 더 많이 보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중간중간에 훈훈하거나 팀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다른 팀과 함께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결국 팀원들끼리만 똘똘 뭉치며, '우리 vs 쟤네'의 거시적인 경쟁구도는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요즘 조금씩 그 플롯이 바뀌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사회를 헤쳐나가면서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들과 언젠간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등수가 매겨지고, 직장에서는 진급을 다투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굳이 서로를 헐뜯고 다투면서 이루어지는 일일까. 꼭 내 곁에 누군가를 꺾어야 내가 앞서나갈 수 있는 것일까. <넥스트 인 패션>과 <퀸덤>을 보면서 나는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누군가 나와 함께 이런 선의의 경쟁을 해준다면 이 치열한 사회가 조금 덜 힘들지는 않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따스한 조언을 해주고 서로를 응원해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훈훈한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