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엄마가 점심을 먹으러 내가 사는 동네로 오셨다. 지하철역 부근에서 만난 우리는 쌀쌀한 날씨엔 뜨끈한 국물이 제격이라며 샤브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엄마는 몇 주전 유방검사에서 조직검사를 권고를 받은 데다 거의 암일 거라는 확신에 찬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고생을 하고 계셨다. 얼큰한 국물에 미나리와 버섯이 듬뿍 들어간 샤브샤브는 쌀쌀한 기운을 싹 잊게 해주었다. 뜨거운 국물을 홀짝이며 엄마는 조직검사를 하기 전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하셨다. 살도 3킬로 정도 뺐고 육고기와 밀가루 음식 자제하는데 애쓰고 있다고 하셨다. (칼국수를 먹으며 그 노력이 무너지긴 했지만 다행히 고기는 넣지 않고 채소만 추가해서 먹었다)
지금 살 빼고 음식 조절한다고 조직검사 결과가 크게 달라질까 생각이 들었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뿐이었다. 칠십의 연세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는 여태껏 병원입원을 한다거나 특정 질환으로 인해 주기적인 병원 내원을 하신적이 없으셨다. 그래서일까 병원에 누워 고통스럽게 치료를 하는 게 너무 싫다고 말씀하신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싫다고. 미나리를 소스에 찍으며 이야기하셨다.
"엄마, 아프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어?"
"간혹 있대. 나이가 많아도 크게 아프지도 않은데 잘 때 심정지가 와서 죽는 거지. 난 그냥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 그것도 복이거든. 그게 엄마 소원이야."
"크게 아프지 않고 죽는 거 괜찮지."
엄마가 본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시면 예전에는 뭘 그런 소리를 하냐며 쏘아붙이곤 했는데 이제는 편안히 이야기를 나눈다. 식당을 꽉 메운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채소와 버섯에 소스를 찍어 먹으며 일상을 나누듯 우리는 죽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칼국수면을 말고 볶음밥까지 해치운 뒤 가까운 카페에서 차 한잔 나누고 엄마와 헤어졌다.
"딸, 오늘 엄마랑 데이트해 줘서 고마워."
엄마의 말을 듣는데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리고 내가 한참 전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우리 일주일에 한 번씩 외식하면서 밖에서 데이트하자."라고 했던 말. 이에 엄마가 반색하며 활짝 웃으셨던 모습도 함께 어른거렸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던 우리는 가끔 서울나들이를 가긴 하지만 일한다고, 애 키운다고 바쁘다며 소홀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조직검사 끝나고 컨디션 봐서 나들이 가자."
지난주 엄마는 대학병원에서 유방조직검사를 하셨다. 다행히 암으로 가는 건 아니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그제야 잠을 좀 편히주무셨다. 별일 아니길 바랐던 내 마음도 편해졌다. 그러고선 엄마는 훌쩍 여행도 다녀오셨다. 이 좋은 계절 이제 많이 다닐 거라고. 지금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조직검사 결과를 앞두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너무 잘하셨다고 응원해드렸다.
"엄마, 여행 다녀와서 나랑 또 데이트해."
엄마와 어제 남산골 한옥마을을 다녀왔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엔 비소식이 있고 종일 흐린 날인 탓에 다음에 가자고 해야 하나 생각이 찰나에 스쳤지만 고개를 도리질하며 비가 와도 우산 쓰면 되지 하고 엄마와의 약속을 깨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구름사이로 태양이 기웃기웃 거린 덕에 비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몇 십 년 만에 와본다는 남산골 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기념품 가게에서 알록달록 팔찌를 보고 "엄마 하나 사줄까?" 하는 물음에 선뜻 "그래 좋아!"라고 하는 엄마가 매우 달가웠다. "내가 이런 초록색을 좋아하잖아." 히며 초록팔찌를 고르셨다. 내가 보기엔 카키색에 가까운데 엄마는 초록이라고 한다. 금팔찌를 사드린 건 아니지만 소소한 것에 기뻐하는 엄마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 처음 가는 미용실을 다녀왔는데 머리를 자르다가 엄마의 목을 보더니 "이렇게 생긴 목을 가지신 분들이 엄청 건강하세요."라고 했고 "목이 참 짧고 두껍죠?"라고 대꾸했다는 엄마의 말. "엄마가 원래 국화 좋아하잖아." 하며 전날 만원에 국화 한 다발을 사 왔다는 말. 어떤 젊은 남자가 유튜브에서 알려준 레시피대로 무생채를 무쳤더니 훨씬 맛있었다는 말. 사소한 말들을 나누다 보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한옥마을 한국의 집 바로 앞에 있는 오랜 칼국수집에 갔다.들깨칼국수와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며 들깨칼국수는 왜 이렇게 싱겁지? 바지락 칼국수가 나오자마자 간을 보니 꽤나 간간한 걸 보며 들깨는 소금 넣는 걸 아무래도 까먹은 게 분명하다며 엄마와 낄낄대며 소금을 듬뿍 넣었다.
아들 유치원 하원시간 전엔 집에 와야 하기에 가볍게 걸으며 카페를 찾다가 전통차를 파는 작은 카페에 갔다. 엄마는 대추생강차를, 나는 쌍화차를 마시며 서로의 차도 맛보았다. 내가 시킨 쌍화차라 500원이나 더 비싸서 훨씬 더 맛있다며 또 낄낄대며 이야기 나누며 우리의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 훌쩍 지나가기 전에 단풍구경 많이 하자며 곧 청와대와 북촌한옥마을도 가기로 했다. 가끔 생각만 했던 창덕궁 예약을 내년에는 꼭 잊지 말고 미리 해서 가보리라 다짐도 했다. 내년 봄, 이 약속은 꼭 이행해야겠다.
엄마가 원래 국화와 초록색을 좋아했던가. 얼마 전에야 엄마가 꽈리고추 반찬을 참 좋아하는 걸 알았는데. 난 아직도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엄마는 먹는 것엔 관대해서 뭐든 잘 드신다고만 생각했다.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을 사느라 엄마가 특별히 좋아하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한 적이 별로 없는 듯 하다. 내가 민트색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엄마의 영향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엄마는 칼국수도 참 좋아하셨다.
내 인생 책갈피에 '엄마'챕터를 새로 만들어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꽃, 장소, 색깔 등 하나하나 내용을 채워가야겠다. 엄마의 바람대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면 후회되지 않도록. 다시 오지 않을 엄마와의 시간 속에 마음껏 행복해야겠다. 행복하려면 기억해야한다. 엄마가 집에 사놓은 국화가 시들해질 즈음 국화꽃을 한 다발 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