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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Nov 24. 2023

잠옷이 좋아졌다

당신의 매일 작고 소중한 행복은 무엇인가요?

재테크로 성공한 어느 젊은이가 유튜브에서 제발 집에서 입는 옷 같은 거에 돈 좀 쓰지 말라며 젊은 여성 멘티들에게 당부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고 재테크를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는 요지였다. 그 당시에 재테크에 관심 있던 나도 알뜰살뜰 돈을 모으는 것이 목표였기에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은 낭비'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누가 본다고 돈 들여 옷을 사야 할까. 외출복 중 좀 낡아진 옷을 집안에서 입거나 저렴한 면티 정도만 사서 집에서 입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잠옷은 단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약 2년 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일에 돈을 들여 잠옷을 샀다. 아마도 스타필드에서 왕창 세일하는 이벤트홀 앞을 지나갈 때 호갱님 모드가 발동되었고,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연말 감성이 돋아나며 빨강 초록에 유독 눈이 많이 갔던 탓이었을 것이다. 강렬한 빨간색에 검정 체크무늬가 있는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잠옷이었다. 이렇게 처음 잠옷을 사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잘 때는 잠옷 입고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샤워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기분이 살짝 묘했다. 곧 있으면 잠을 청할 테지만 어떤 새로운 활동을 하기 위해 환복을 한 것 같은 느낌. 하루 일과와 육아를 마치는 마무리 의식 같은 느낌. 방금 전 상황과 단절시키는 조금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옷은 사람의 태도를 결정한다고 했다. 정장을 입으면 행동거지가 요란스럽지 않아 진다.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행동이 커지며 자유로워진다. 잠옷을 입는 건 나에게 이제 휴식을 취하고 마음껏 노곤노곤해져도 된다고 승인받는 것 같은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저녁에 잠옷 입는 것이 작은 행복이 되었다. 살갗에 닿는 느낌이 부드러우면서 자연 친화적인 소재로 만든 잠옷을 골라 사보기도 하고, 계절별로 두 벌씩은 있어야 한다며 색깔이 겹치지 않게 사는 재미도 생겼다. 외출복 살 때보다 뭔가 느슨한 기분이 들며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잠옷을 입기 시작하며 추가된 루틴이 하나 있다. 샤워 후 바디로션을 꼭 바르는 것이다. 원래 샤워 후 바디로션을 바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감각이 좀 둔한 탓인지, 몸의 건조함을 적당히 무시해도 별 탈 없었기에 바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샤워 후 바디로션을 바른다는 사실에 다소 놀란 사람이니까. (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잠옷을 입으면서 내 몸에 관심이 생기면서 피부가 매우 건조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바디로션을 바르면 몸이 끈적해지고 거기에 잠옷을 입으면 찝찝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욕실에서 바디로션 바른 뒤 얼굴 화장품을 바르면서 시간을 벌면 어느 정도 흡수가 되어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바디로션 바르고 잠옷을 입었을 뿐인데 뭔가 나와 내 몸을 존중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동안 나는 내 몸과 피부를 홀대했었던 것 같다는 반성과 함께. 건조한 피부 상태에서 티 쪼가리 걸치며 내 피부의 상태에 무심했던 나의 태도에서 나오는 결과 같은 것들이었다.  


아, 이렇게 내가 나를 존중하고 예뻐해 주는 방법도 있구나! 내 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주는 것은 기분과 행복감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머리 감고 화장을 하는 사람. 딱히 외부 일정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색조화장까지 마무리 짓는 사람. 그렇게 몸을 단장하고서야 집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 5년에 한 번씩 증명사진을 찍어 현재의 예쁨을 기록하고 간직하는 사람. 바로 우리 시엄니이시다.  


시엄니는 얼마 전 칠순을 넘기셨다. 몸이 여기저기 불편하다 하시지만 뵐 때마다 늘 정갈하고 예쁘시다. 10년 전, 아들이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리마인드 웨딩촬영을 해드렸는데 현장에서 메이크업하시는 분이 "어머! 메이크업을 따로 하실 필요 없으시고, 눈썹만 좀 붙이시면 될 것 같아요."라고 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으셔서 화장도 곱게 잘하신다. 내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자는 늘 꾸며야 해."


본디 남자는 어때야 하고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9년 전 꽤 어리고 싱그러운 얼굴을 보유하고 있던 나는 저 말을 건성으로 듣고 넘겼다. 오히려 집에서 굳이 왜 화장을 하고 계실까? 하며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늘 꾸민다는 게 낭비하며 비싼 돈 들여 몸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게 스스로가 관심을 갖고 정갈한 몸을 유지하라는 말씀인 것을 말이다. 꾸미고 단정하려면 내 몸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 꾸밈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오늘 하루 잘 지내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도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꾸밈은 스스로에게 만족감과 기쁨을 가져다준 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브런치에 어느 작가님 글을 하나 보았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집에서 홀로 일할 때에도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일을 하신단다. 그럼 집중도 더욱 잘되고 일도 잘 되는 느낌이라고. 그 글을 보면서 어떤 기분인지 정도는 알 것 같아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스스로에 대한 관심과 꾸밈은 자기애의 출발이며 자존감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하의 날씨로 기온이 뚝 떨어지는 본격적인 겨울추위가 찾아왔다. 얼마 전 날이 갑자기 따뜻해졌을 때 미리 포근한 잠옷을 사두었다. 매일 저녁 느끼는 작은 쾌감을 알려주고 싶어 신랑에게도 잠옷을 사주었다. 멋쩍은 듯 꼭 입어야겠냐는 무언의 표정을 읽었지만 사온 성의를 봐서인지 꼬박꼬박 잘 입고 잔다. 작고 소중한 행복을 매일 누리는 것에 소비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돈 낭비'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약간의 돈을 지불할 작고 소중한 행복이 없었던 흘러간 나의 지난날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제는 온종일 집에만 있는 날에도 정갈한 실내복을 입고, 머리를 감고, 얼굴을 단정히 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마냥 귀찮지만은 않아지고 있다. 별것 없는 하루일 테지만 그래도 설레게 하루를 살아보자는 약간의 다짐이라 여기니 활기찬 느낌이 가득해진다.


올 겨울 작고 소중한 행복을 가져다줄 신상 잠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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