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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다시, 왔다

 그녀의 하루는 기억으로 열리고, 기억으로 닫힌다.

 열쇠로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면 그 곳은 어제의 시간, 흔적을 그대로 품고 달려든다. 말끔히 정리를 하고 가도 그렇다. 밤새 무언가를 응집해 품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서면 그대로 놓아버리듯 풀어놓는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그녀가 만나는 것은 새로운 하루가 아닌 전날의 자국, 체취, 형상들이다.

 책방에 왔던 누군가와 또 누군가들.

 그들이 사간 어제의 책. 그녀가 읽다 덮어둔 책.

 혹은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문에 대해. 그것들에 대한 기억으로 하루는 시작된다.


종일 혼자였던 어느 날이었다.

책을 읽다 지쳐, 턱까지 늘어진 졸음에 지쳐 잠시, 아주 잠시 시장 한 바퀴를 돌았다. 겨울다운 찬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 그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책방 앞에 서 있었다. 안쪽 공간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종아리의 붓기는 다소 풀리고 머리는 맑아졌는데, 왠지모를 낭패감이 들었다. 잠깐의 어긋남이다. 얼른 문을 열고선 미안한 마음에 무슨 말인가를 막 했다. 그리고 숨을 돌리고 나니 손님은 책에 근접해, 책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한탸족이구나. 어쩌다 찾아오는 모르는 손님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느린 걸음, 수줍어하는 표정, 말 없는 말투, 책방의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책장의 책들을 유심히 살피는 움직임.

 그 손님도 그랬다. 아니 그 소년.

 수줍게 문학 읽기 모임의 책들에 대해 물어왔고, 참석하고 싶다고. 하지만 독서 모임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고 3 졸업한다는 말이, 작게 타들어가는 말 끝에 묻어나왔다. 짧은 머리카락과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약간의 여드름, 안경 너머 숨어 있는 눈, 아직은 여린 어깨. 소년에게 그녀는 물었다.

 "평소에 소설 읽나요?"

 "아니요. 저는 시를 읽어요."

앗. 전에 왔던 그 청년처럼 이 소년도 시를 읽는다. 그 청년에게 했던 것처럼 소년에게도 시집이 많지 않다고 다소 부끄럽게 그녀는 말했다. 소년은 그 이후 한참 양쪽의 책장을 살폈다. 그리고 세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소설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저 지금 돈이 없어요. 다시 올건데 이 책 따로 놔두면 안될까요?"

그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했고 소년은 야윈 어깨를 움츠린 채 가게 밖을 나섰다.


죽음의 자서전 (시집, 김혜순)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시집, 심보선)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시집, 에밀리 디킨슨)

달에 울다 (소설, 마루야마 겐지)


 며칠 후 손에 현금을 쥔 채 소년이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저 알바해서 오늘 처음으로 인출기로 돈 찾았어요!"

그렇게 소년은 다시 왔고, 첫 알바로 번 돈으로 보관해 두었던 책을 사갔다. 다음 독서모임 참가비까지 미리 주고선.

 오늘 그녀의 기억은 그 소년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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