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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누 Feb 03. 2021

전조등 없는 안개 낀 도로

디자인 스튜디오 생존기 #03

우리는 목표치를 웃도는 돈을 벌었고, 사이좋게 혈변을 봤다.


1인 12,000원의 무한리필 고기집 회식에서 55,000원짜리 모둠회 회식으로,

선택적 서체 사용에서 모든 서체 사용으로,

일일이 체크하던 지출비용을 3개월 뒤쯤 확인하는 관대한 마음으로,

미래의 나에게 담아뒀던 장바구니를 수시로 비워내고,

히로&메로(애묘) 앞으로 드는 비용을 형에게 물려받고,

장거리, 연비를 맞추려 브레이크를 덜 밟던 발에게서 벗어나게 되었다.


친구와 자주 싸웠고, 직업정신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클라이언트 신뢰회복을 위해 힘썼고,

내 방을 잃었(었)고, 히로&메로는 나에게 과잉의지하게 되었다.


1월을 안식 달로 하고 제주 계획을 짰다. 


가기 전 친구를 서울로 데려다줬다. 친구의 짐 모두 내 손으로 차에 실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밉기만 했던 친구의 장난이 살가웠고, 차창 밖 공기가 기분 좋게 차가웠다.


홀로 제주로 출발하며 완도항으로 향했다.

새벽, 불과 5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도로를 1시간가량 달렸다.

앞 유리창에 쉽게 닦이지 않는 서리가 지겹도록 엉겨 붙었고,

조금씩 길을 밝혀주던 주위의 차들도 점차 사라졌다.


안갯속 어둠.

서행하며, 중간중간마다 잠시 내려 유리창을 닦으며, 가사가 들리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는 상상을 하며, 전조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며,

안개 낀 도로를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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