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

결국 살아있는 한

by 한울 Hanul

기대는 무너지고, 계획은 틀어지고, 미래를 안다고 자만하며, 나아가는 것보다 과거에 머무르기를 택한다. 어느 순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돌아보면 끝나고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대부분 잠시 멈췄던 순간들뿐이다. 어찌 되었든 시련은 계속 찾아오고 나아가야 하는 시기가 온다.

인생은 하나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수정이 반복되는 원고와 비슷하다. 필요 없다고 지워버린 문장도, 틀린 단어도,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버린 단락도 결국은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나중 전개에 가장 필요한 문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당시에 중요하다 생각한 것도 중요하지 않고, 필요 없다 생각한 것도 필요할 때가 온다.


그러니 실패와 후회라는 것도 조금은 다르게 봐야 한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시간이 나중의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교훈을 줄 것이다. 인생에서 따져보면 완전히 쓸모없는 경험,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 뿐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들이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어 좋은 거름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당장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느낄 필요도 없다. 아직 쓰지 못한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꼭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지만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던 이상향이 현재와 맞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미래가 여전히 불확실한 이상 그 무엇도 결정된 것이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다시 시작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볼 자격이 있다. 조용히, 천천히,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힘든 시기에는 원래 많은 것을 보기가 힘들다. 분명 나는 행복하고 즐기기 위해 살고 싶은 것인데, 당장의 결과와 성과. 결국에는 증명해야 하는 것들에 모든 신경이 쏠리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때의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하겠다는 명분으로 많은 것을 제쳐두고, 중요한 것들을 너무 쉽게 버려버렸다. 내 마음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사회가 말하는 기준에 나를 맞춰보기도 하고, 남의 말에 휩쓸리고 기대어 선택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중요치 않다며 의미 없는 것들을 밀어내기도 했다. 지나 보면 꼭 그렇게 모질게 굴어야 했을까 싶은 것들이 떠오른다. 잡지 못한 것들이 통탄스럽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과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의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바뀐다. 이번 일만 해내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일들이 남아 있고,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줄 알았는데 중요한 건 의외로 아래에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부르는 것들은 그저 어느 시점의 우리가 잠시 붙여 놓은 허울 좋은 의미일 뿐이다.


그러니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좋다. 이렇게 해도 어떻게든 교훈을 얻고, 어떻게든 상처를 받고, 어떻게든 새로움을 마주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자. 모든 것을 완벽한 이상과 기준으로 선택하려 애쓰기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들도 다시 바뀌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결국 인생에서 완전히 틀린 선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모든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나라는 사람 안에 남고 언젠가는 다른 모습으로 쓸모가 생긴다. 처음부터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을 살고 올바르게 만들고자 하는 것. 그것이 살아가면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이 과정을 거듭하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될수록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의미나 가치 따위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 속에서 뒤늦게 생겨나고 붙여진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도 확실할 필요 없다. 중요하다고 믿고, 판단하고,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기준들이 생각보다 쉽게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안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나? 인생을 좌우할 것처럼 중요했던 일들이 떠올려보면 어제 일처럼 생생한가? 이미 새로운 것들로 덮이고, 그저 지나간 사건 하나로 남아 있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실패도, 그렇게 부러워했던 성공도 시간의 앞에서는 빠르게 희미해진다.


정말로 모든 것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소중했나. 혹은 우리가 너무 많은 것들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쫓기듯 살아온 건 아닐까. 만약 의미라는 것이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은 것이라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쫓기지 않고, 쫓고 싶은 것을 따라갈 수 있다. 누군가의 시선이 두려워서, 뒤처진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도망가고 달아나는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여 한 번쯤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완벽한 정답 같은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고, 선택한 그 순간의 떨림이고, 두려움이고, 후회고, 경험이다. 나는 학창 시절 내가 시험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장 최선을 다하고 열중하며 공부했던 시간은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느낀 순간을 기억한다. 옛 인연을 보내고, 새 인연을 맞이한 것을 기억한다.


영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없으니 그때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가능하다면 덜 후회하는 쪽으로. 의미는 결국 선택하고 살아 본 사람에게 부여되고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흔들릴 것이라면 원하는 방향으로 흔들려보고 싶다. 그래야 흔들린대도 재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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