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건 내가 아니야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을 응원하겠습니다.'
'심사숙고하였으나….'
'죄송스러운 마음….'
'아쉽게도….'
앞날을 응원하기는 무슨? 정말로 응원하고 싶다면 저 합격 앞의 '불'이라는 글자를 떼라. 내 앞길을 턱턱 막아놓고 응원한다니. 형식상 하는 말임을 안다. 아는데,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원이라는 다정한 말도 절망적인 기분 앞에서는 기만으로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경쟁이 심하다고는 해도 그 경쟁에 휩쓸려버리고 만 사람이 '나'는 아닐 것이라고. 굳이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뜩이나 예민해 무조건적인 긍정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네 진가를 못 알아본 거야."
"넌 실행력도 있고 멋진 애잖아. 떨어질 사람이 아니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든 소식을 알게 된다. 합격이나 취직 등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모를 수가 없고 아무 소식이 없으면 자연스레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고생했다는 격려가 고마웠다. 솔직히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 따뜻한 말들은 내 상황을 조금도 바꿔주지 않는다. 그러니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엔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말로는 곧장 현실을 받아들였다. 지원한 곳에서 나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내가 더 준비해야 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부정할 수도 없는 문제다. 결과지가 내 손에 놓여있는데 그걸 찢는다고 진실이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그걸 인정한 나 자신과 마음 사이의 거리였다.
사람들은 나를 멋지다고 말했다. 용기 있고, 성실하고, 다정하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정통으로 받고 탈락한 이후에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칭찬은 실패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니까. 현실의 나는 시험에서 떨어졌고, 결과라는 단편적인 잣대로 보면 '멋진 사람'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괴리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한동안 두 개의 나 사이에서 헤맸다. 사람들이 말하는 멋진 나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부족한 나. 두 개의 나 모두 거짓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정말 멋져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인생을 사는 건 나인데. 인정해야 하는 나 자신은 당연히 '하나'였다. 진실은 인정하기 싫을 만큼 아프다. 매일 균형을 잃었다. 차라리 편안한 허상 속에서 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내 마음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3주 정도 걸린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절망하든 세상이 잘 돌아가는 걸 보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합격 증서, 아침부터 커피를 제조하는 아르바이트생,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학부생, 그리고 놀러 가자는 친구의 연락. 놀 기분은 아니었지만 뭐가 됐든 사람들의 생기가 내게 전해졌으면 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자고 다짐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움직이는 만큼 나도 다시 일어서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그게 정말 글러 먹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람을 만나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실패와 성공. 충분함과 부족함. 0과 1 따위의 양자택일로 사람을 나눌 순 없다.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떨어졌지만 저마다 이야기는 다양하다. 일을 하다 대학에 입학한 25살, 아이를 키우면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 전과에 성공한 사람, 유학 가서 언어장벽을 느끼는 사람. 다들 경험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개척하는 중인데 누가 감히 단편적인 것만을 보고 비판할 수 있을까. 25살에 1학년이라고 비웃을 것인가, 영어도 못 하면서 유학을 갔냐고 비웃을 것인가. 그 사람으로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일개 인간이 한 사람의 미래를 '알만하다'라고 감히 단정 지을 순 없는 일이었다.
결과는 너무도 명확하지만 나의 전부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스스로가 부족했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 역시 나의 일부라는 것. 당시에는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기적적으로 떠올렸다 해도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너무 힘들면 시야가 좁아져 멀리 볼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결국 인정해야 하는 나 자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힘든 시간 역시 나를 만드는 과정이었으며, 부족함과 가능성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이며 진정한 나였노라고.
내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멋지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조금씩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족한 나 또한 포용하고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불합격은 무가치와 동의어가 아니었고, 멋진 나는 거짓된 내가 아니었다고. 그저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실패를 인정하는 일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오래 걸린다. 특히 기대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렇다. 열심히 해온 게 있고, 지나온 시간이 있다. 그동안 이루어낸 성취감과 시간은 나름대로 근거가 되어준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잘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실패는 단순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결과가 아니라 내가 믿어 온 시간과 괴리를 한 번에 들추는 일이 된다. 그 괴리는 클수록 아프다.
사람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에 아파하지 않는다. 복권을 샀는데 1등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한 달을 내리 앓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조금 아쉬운 마음만 생길 뿐. 일상생활에 지장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아픈 만큼 많은 마음을 걸어두었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는 증거다. 그래서 어떤 이의 회복은 별것 아니게 보여도 유난히 더디다. 상처가 크거나 깊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노력과 희망이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하는 과정은 결심이 아니다. 영화에서 적이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라고 말한 뒤 쓰러지는 등의 상황에 빗댈 수 없다. 실패하고 나서의 인정이란, 내 이성은 물론이고 가슴과 감정이 스며들 때까지 여유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인정을 선언한 당일은 괜찮다가도 다음날은 다시 무너진다. 아직 나의 자리를 현실에 내어줄 만큼 충분한 시간과 마음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씩 이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아픈 것을 덮어두고 애써 괜찮다며 합리화하면 편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조차도. 언젠가는 그 고름이 버티지 못해 터져 나와 더욱 깊고 험한 곳으로 이끈다. 다만 합리화 또한 회복의 과정이라면 괜찮다. 그만큼 자신을 속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면야 잠시 미뤄도 좋다. 느린 회복은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니까. 오히려 그만큼 진지하게 미래를 꿈꾸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은 단순한 포기보다 훨씬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마주하고 천천히 선택을 내리는 것은 분명한 삶의 일부다. 아픈 상처를 당장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어떤 시작은 마음이 완전히 정리된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아픈 상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새해가 밝았네요. 2026년의 첫 글입니다.
독자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