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의 소유

과정이 증발한 자리에서, 소유는 무엇 위에 서는가?

by 최원혁

프롤로그


새벽 한 시, 커밋 메시지를 써야 한다. "feat: 사용자 인증 기능 추가".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멈춘다. 이 메시지에서 "추가"의 주어는 누구인가. 나는 인증 기능의 코드를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변수명 하나 짓지 않았고, 조건문 하나 설계하지 않았다. 프롬프트를 입력했고, 엔터를 눌렀고, 화면에 쏟아져 내린 코드를 읽지 않은 채 승인했다. 커밋 로그에는 "Author: 나" 라고 찍혀 있다. 기계식 키보드의 딸깍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벽에 부딪혀 돌아온다.


코닥 1903년 광고


1903년, 코닥은 광고에 이렇게 썼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합니다. 122년 전에도 같은 질문이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것만으로 사진의 창작자가 될 수 있는가.


image.png 1903년 코닥 광고 (출처: 위키피디아)


1884년 Burrow-Giles 대 Sarony 판결에서 법원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사진가가 구도를 잡고, 조명을 고르고, 순간을 선택하는 행위에 창작성이 있다고. 셔터 이전에 충분한 판단이 있었으므로. 한 세기 뒤, 원숭이가 셔터를 눌러 찍은 셀카에 대해 법원은 누구에게도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카메라 주인에게도, 원숭이에게도. 판단 능력 없이 트리거를 당긴 행위에는 창작자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이브 코더의 엔터 키는 어느 쪽 셔터에 가까운가. 사진가와 원숭이를 가르는 것은 판단이었다. 결과를 예측하고,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소유의 역설


건축의 세계에서는 이 구분이 법으로 오래전에 정리되어 있다. 건축주가 "남향, 3층, 마당 넓게"라고 말하면, 건축가가 도면을 그리고 구조를 계산하고 공간의 흐름을 설계한다. 완공된 집에 건축주가 입주한다. 집은 건축주의 것이다. 저작권은 건축가에게 있다. 소유하되 창작하지 않은 자와, 창작하되 소유하지 않은 자가 수백 년 동안 공존해 왔는데, 바이브 코딩에는 이 분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코드의 저작권이 누구의 것인지, 앱의 소유권이 누구의 것인지, 그 둘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조차 아무도 정하지 않은 채 앱스토어에는 매일 새로운 앱이 올라간다.


퀸시 존스가 "Thriller"를 프로듀싱할 때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어둡게." "이 부분은 숨을 멈추는 느낌으로." 세션 뮤지션들이 음표를 만들어냈고, 퀸시 존스의 이름이 프로듀서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연주한 것을 듣고 판단할 수 있는 귀가 있었으므로. 바이브 코더에게는 그 귀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코드가 화면에 쏟아져 내릴 때, 초록색과 흰색과 주황색 구문 강조가 번갈아 나타나고, 눈은 텍스트를 따라가지만 뇌는 따라가지 못한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을 보는 감각과 비슷하다. 글자는 보이되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코드의 양이 충분해 보이고, 들여 쓰기가 정돈되어 보이고, 빨간 에러 메시지가 안 보이면 "괜찮겠지"가 밀려온다. 외국어 계약서의 길이와 형식만 보고 잘 쓰인 계약서라고 짐작하는 것과 같은 구조인데, 계약서의 경우에는 적어도 우리가 그 위험을 안다.


image.png 퀀시 존스 (출처: 나무위키)


로크의 하인과 도토리


존 로크가 소유의 기원을 노동에서 찾았을 때, 그는 단순한 공식을 제안했다. 자연 상태의 것에 노동을 섞으면, 그것은 노동한 자의 소유가 된다. 들판의 나무를 베어 의자를 만들면, 의자는 나의 것이다. 딸깍은 노동인가? 직관적으로는 아니다. 하지만 로크 자신이 흥미로운 구절을 남겨놓았다. "하인이 주운 도토리는 주인의 것이다." 주인은 도토리를 줍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았다. 지시했을 뿐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바이브 코더가 AI에게 "만들어라"라고 지시한 이상 결과물은 바이브 코더의 것이어야 하고, 딸깍은 300년 전 균열의 당연한 귀결이 된다. 노동의 직접성은 처음부터 소유의 본질적 근거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노동소유론은 다른 것 위에 서 있었다. 노동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의지가 있었느냐라는 형식. 노동이 제로에 수렴해도 소유가 성립한다면, 이 결론은 딸깍에 유리하면서 동시에 소유라는 개념 전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모니터 불빛이 책상 위 커피잔에 반사되어 흔들린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터미널의 커서는 깜빡이고 있다.


헤겔이라면 노동이 아니라 의지를 가리켰을 것이다. 소유란 자유의지의 외적 표현이라고 그는 썼다. 내가 어떤 대상에 의지를 투사할 때, 그것은 나의 것이 된다. "이런 앱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프롬프트로 외화했으며, 결과물은 의지가 물질화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딸깍에 유리하다. 그런데 헤겔에게 소유의 본질은 의지의 투사 자체가 아니라, 투사를 통한 자기 인식이었다.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내 생각의 흔적, 내 판단의 자국, 내 존재의 연장. 딸깍으로 만든 코드를 바라볼 때 나는 거기서 무엇을 확인하는가. 읽을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수정할 수 없다. 의지의 출발점은 나였지만, 도착지 안에 나는 없다.


image.png 좌측부터 존 로크, 헤겔, 마르크스


씨앗을 뿌린 농부의 밭에서 토마토가 자란다. 농부는 광합성을 수행하지 않았고, 뿌리를 뻗지 않았으며, 열매의 맛을 설계하지 않았다. 조건을 조성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수확물은 의심의 여지 없이 농부의 것이고, 수천 년간 아무도 이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이브 코더도 프롬프트라는 씨앗을 뿌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농부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밭에 나가 빨간 열매를 보고 "이것은 토마토다"라고 말할 수 있다. 토마토와 독초를 구별할 수 있다. 바이브 코더는 자기 밭에서 자란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지 못한다. 실행 버튼을 누르면 브라우저에 앱이 뜬다. 버튼이 있고, 색깔이 있고, 클릭하면 반응한다. 작동한다. 가슴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고, "내가 이걸 만들었어"라는 문장이 0.1초 만에 형성된다. 24시간 뒤 사용자가 보고한다. 이 버튼 누르면 앱이 꺼져요. 에러 로그의 빨간 텍스트가 터미널을 채우는 순간, 어제의 소유감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힌다. 어제는 "내가 만들었다"였는데, 오늘은 "나는 이것을 모른다"로 바뀌어 있다. 다시 AI에게 물어야 한다. 이 에러 고쳐줘. 고치는 과정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르크스의 자발적 소외


마르크스는 이것을 소외라고 불렀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과정과 노동 산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 공장 노동자는 핀의 완성품을 보지 못했다. 핀의 머리 부분만 반복적으로 깎으면서, 전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바이브 코더의 상황은 더 극단적이다. 공장 노동자는 적어도 핀의 머리를 깎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바이브 코더는 코드 수준에서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런데 기묘한 역전이 일어난다. 공장 노동자의 소외는 고통이었고, 강제된 것이었다. 바이브 코더는 소외를 선택한다. 코드를 읽고 싶지 않다. 과정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결과만 원한다. 소외가 편안하고, 효율적이고, 즐겁기까지 하다. 소외가 쾌락이 될 때, 그것은 여전히 소외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


종교의 회피


이슬람에서 꾸란은 무함마드가 "쓴" 것이 아니라 신이 대천사 지브릴을 통해 "내려준" 것이다.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의 바울 서신도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손이 움직였지만 진정한 저자는 신이라는 구조가 수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신에게 인세를 청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유권 분쟁은 복수의 주체가 같은 것을 주장할 때 발생하는데, 신은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았다. AI는 다르다. 서버 비용이 나가고, 학습 데이터에 출처가 있고, 모델을 만든 회사가 있다. 영감의 도구라는 은유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딸깍의 소유 문제는 세속의 계약서가 필요해진다.


2025년 1월, 미국 저작권청은 보고서를 냈다. 프롬프트만으로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충분한 인간의 창작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법이 선을 그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 선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바이브 코딩으로 만든 앱이 앱스토어에 올라가고, 사용자를 모으고, 투자를 받는다. 기업가치가 매겨진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코드는 누구의 것인가. 작동하고, 돈이 되고, 다음 업데이트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세 기둥


역사적으로 소유의 정당성은 세 개의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의도 — 만들겠다는 결정을 내렸는가.

② 과정 — 만드는 행위에 참여했는가.

③ 검증 — 만들어진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건축주에게는 의도가 있고, 농부에게는 의도와 과정이 있고, 사진가에게는 의도와 검증이 있다. 바이브 코더에게는 의도만 있다.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결과를 검증할 능력이 없다. 의도만으로 소유가 성립한다면 소유의 정의가 달라져야 한다. 성립하지 않는다면, 지금 앱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수만 개의 앱은 주인 없는 것이 된다.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 답이 편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필로그


다시 새벽. 커밋 메시지 입력란의 커서가 깜빡인다. 모니터의 블루라이트가 얼굴 아래쪽만 비추고, 식은 커피잔 표면에 방의 어둠이 고여 있다.


feat: 사용자 인증 기능 추가


엔터를 누른다. 커밋이 기록되고, 로그에 내 이름이 남는다. 내일 아침 동료가 깃 히스토리를 열면 이 커밋을 나의 것으로 읽을 것이다. 그것이 서명인지 서명의 흉내인지, 깃은 판단하지 않는다. 나도 판단하지 않기로 한다. 적어도 오늘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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