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캘린더의 물리학

일은 주어진 시간을 채우도록 팽창한다.

by 최원혁

1955년, 영국의 해군 역사학자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이 이코노미스트에 익명의 에세이를 기고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1914년에서 1928년 사이, 영국 해군의 주력 함정은 62척에서 20척으로 줄었다. 68퍼센트의 주력 함정이 바다에서 사라졌다. 같은 기간 해군성 관료는 2,000명에서 3,569명으로 78퍼센트 늘었다. 배가 사라지는 동안 사무실은 매년 5.73퍼센트씩 팽창했다. 함대의 크기와 무관하게, 마치 자체 추진력이 있는 것처럼. 파킨슨은 여기서 한 문장을 끌어냈다. "일은 주어진 시간을 채우도록 팽창한다." 원래 관료제를 겨냥한 풍자였지만, 풍자가 이론보다 오래 사는 법이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한 문장은 살아 있다.


일은 주어진 시간을 채우도록 팽창한다.


보일의 법칙


밀폐된 용기 안에 기체를 넣으면, 분자들은 용기가 얼마나 크든 주어진 공간 전체를 균일하게 채운다. 의지도 없고, 게으름도 없고, 완벽주의도 없다. 보일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1662년에 발견되었고, 파킨슨의 법칙보다 293년 앞서 있다. 둘은 같은 것을 기술하고 있다. 기체에게 '빈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에게 '남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는 불편한 이유가 있다. 시간을 채우는 것이 의지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물리적인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모니터에 주간 캘린더를 띄운다. 한 주가 하얗게 비어 있다. 마우스 커서가 빈칸 위를 떠돌지만 아무것도 클릭하지 않는다. "이번 주는 여유롭겠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지나면 분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월요일의 이메일 정리가 화요일 오전까지 번지고, 수요일 회의 준비가 이틀치 공간을 삼키고, 목요일에는 급한 요청 하나가 나머지 빈칸을 메운다. 금요일 퇴근길에 빈 캘린더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용기가 넓었을 뿐, 기체의 양은 처음과 같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마빌레의 역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테레사 아마빌레가 7개 기업 222명에게서 수천 건의 일일 기록을 수집한 뒤 발견한 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사실 시간 압박을 받는 날,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 확률은 45퍼센트 낮아졌다. 여기까지는 직관과 맞는다. 그런데 같은 직원들이 설문에 적은 것은 정반대였다. "오늘은 특히 창의적이었다." 압박이 집중을 낳고 집중이 몰입처럼 느껴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뇌는 덜 창의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가장 바쁜 날을 가장 생산적인 날로 기억하고, 그 기억이 틀렸을 가능성은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을 넉넉히 주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용기를 키우면 압력이 내려가고 기체는 편안해질 테니. 그러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새벽 두 시. 방 안에는 모니터 불빛뿐이다. 얼굴이 푸르스름하다. 보고서의 같은 문단을 일곱 번째 고치고 있다. 다섯 번째 수정이 네 번째보다 나은지 이미 분간이 안 된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피로인지 망설임인지. 파일 이름 옆의 별표가 저장되지 않았음을 알린다. 마감이 없으므로 이 밤은 끝나지 않는다.


2025년 임상심리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는 이 장면의 밑그림을 드러낸다. 부적응적 완벽주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내성, 경험적 회피 — 이 세 가지가 진단 범주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구조로 묶여 있다. 풀어 쓰면 이렇다.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이 아니다.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말 뒤에 숨는 회피 전략이다. 완성하면 노출되고, 노출되면 판단받는다. 판단이 두려운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전략은 완성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넉넉할수록 완성을 미룰 공간도 넓어진다. 기체에게 용기가 커지면 분자 하나하나의 운동이 느슨해지듯, 여유로운 시간은 결정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마감은 그 공간을 압축한다. 마감 세 시간 전 사무실의 공기는 다르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형광등 소리가 귓속에 들어오고, 키보드 소리가 산만한 타건에서 짧고 빠른 리듬으로 바뀐다. 재봉틀 같다. 옆자리 동료의 커피잔이 식어 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보일의 법칙을 뒤집으면 이렇다 — 용기가 줄면 압력이 올라간다. 세 시간 전까지 팽창해 있던 일이 손가락 끝으로 수축하고 있다. 그 압력에 집중력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우주인 구하기


1970년 4월 14일, 아폴로 13호의 산소 탱크가 폭발했을 때 NASA의 미션 컨트롤의 엔지니어들에게 주어진 것은 87시간이었다.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살려야 했고, 손에 있는 것은 우주선 안의 비닐봉지, 판지, 덕트테이프뿐이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CO2 필터를 만들었다. 무한한 시간과 완벽한 장비가 있었다면 더 나은 필터를 설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87시간의 필터로 세 명은 살아 돌아왔다.


같은 NASA에서 16년 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이 저온에서 위험하다는 것을 엔지니어 앨런 맥도널드는 알고 있었다. 발사 연기를 간청했다. NASA 관리자의 답: "그러면 내년 4월에 발사하란 말이냐?" 이미 여러 차례 지연된 일정이 만든 압력이 경고를 눌렀다. 73초 뒤 일곱 명이 죽었다. 아폴로 13의 마감은 살렸고, 챌린저의 마감은 죽였다. 제약 자체는 방향을 갖지 않는다. 어디에 걸리느냐가 전부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서 다행인 삶


그런데 만약 제약이 아예 없다면. 야나체크의 오페라에 엘리나 마크로풀로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불로장생의 약을 먹고 342년을 살았다. 모든 산을 올랐고 모든 책을 읽었고 모든 사랑을 겪었다. 그녀가 도달한 곳은 극도의 권태였다.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의 논증을 끌어냈다 —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어딘가에 닿고 싶다는 욕구는 시간이 유한할 때에만 힘을 갖는다고.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한 존재"라 부른 것도 같은 구조다. 죽음이라는 최종 마감이 삶 전체에 긴장을 건다. 일이 마감만큼 팽창한다면, 삶은 수명만큼 팽창한다. 마감이 영원히 오지 않는 삶에서 우리는 아마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2026년 3월, BCG 조사가 하나의 수치를 내놓았다. AI 도구를 네 개 이상 사용하는 노동자의 효율이 급락했다는 것이다. AI가 절약해 준다는 시간의 37에서 40퍼센트가 AI의 결과물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데 다시 소모되었다. 집중적 작업 시간은 오히려 9퍼센트 줄었다. "AI 뇌 과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AI는 실행을 자동화했지만 결정을 자동화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실행을 대신해 줌으로써 인간에게 결정만 남겼다. 코드를 AI가 쓰는 시대에 프로그래머에게 남는 것은 "어떤 코드를 쓸 것인가"이고, 글을 AI가 쓰는 시대에 작가에게 남는 것은 "어떤 글을 쓸 것인가"이다. 선택지가 무한해졌다. 그리고 결정은 선택지만큼 팽창한다.


에리히 프롬은 1941년에 썼다. 인간은 자유로워질수록 더 고립되고 불안해진다고. 자유가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되는 순간이 온다고. 모든 제약을 제거하는 것을 진보라 부르는 문명이 있고, 제약이 있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종이 있다. 둘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에필로그


다음 주 캘린더가 하얗게 비어 있다. 용기가 무한해지면 압력은 0에 수렴한다. 압력이 0인 공간에서 기체는 형태를 잃는다. 342년을 산 여성은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커서가 빈칸 위에서 깜빡이고 있다. 기체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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