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이 돌아오는 순간

테루아 (땅이 가진 고유한 맛)

by 최원혁

출근길, 지하철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수백 명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 보폭이 비슷해지고, 속도가 맞춰지고, 어깨 사이의 간격이 일정해진다. 이 흐름 속에서 걷는 일은 거의 힘이 들지 않는다. 발바닥에 압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흐름에 실려 간다.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면서 걷는다. 생각할 필요도, 판단할 필요도 없다.


오늘은 골목으로 꺾었다. 흐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발바닥에 땅의 감촉이 돌아왔다. 보도블록의 울퉁불퉁함, 바람의 방향, 간판 아래 그늘의 서늘함. 자기 발소리가 들린다. 앞사람의 뒤통수 대신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흐름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1951년, 솔로몬 애쉬는 방 하나에 여덟 명을 앉혔다. 화면에 선 세 개를 보여주고, 기준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고르면 된다. 누가 봐도 답이 보인다. 그런데 여덟 명 중 일곱은 실험 협조자였고, 의도적으로 틀린 답을 말했다. 진짜 피험자는 마지막에 답하는 한 명뿐이었다. 결과, 75%가 최소 한 번은 눈앞의 정답을 버리고 다수의 오답을 따랐다. 피험자의 동공이 흔들렸다고 한다. 몸은 알고 있었다. 입이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의견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 더 무섭다. 선의 길이. 해석의 여지가 없는 물리적 현실. 그런데도 방 안의 공기가, 일곱 사람의 자신 있는 목소리가, 혼자만 다르다는 감각이 눈을 이겼다. 뇌과학자들은 사회적 고립을 물리적 고통과 같은 신경 회로가 처리한다고 말한다. 다수에서 이탈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프다.


면역 체계에도 이것과 닮은 구조가 있다. 흉선에서 T세포는 "자기"와 "비(非) 자기"를 식별하는 훈련을 받는다. 이 식별이 무너지면 자가면역질환이 된다. 몸이 자기 자신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것, 알고리즘이 골라준 취향을 내 취향으로 믿는 것은 이것과 같은 구조다. 가장 위험한 동조는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조다.


넷플릭스에서 우리가 보는 콘텐츠의 80%는 알고리즘이 골라준 것이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 1주일만 노출되어도, 통상 3년이 걸리는 수준의 정치적 태도 변화가 발생한다는 연구가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조종한다고 불평하기 쉽지만, 정확히 말하면 알고리즘은 우리가 클릭하고 머물고 좋아요를 누른 것들의 거울이다. 이것은 감시가 아니라 공모다. 공모자는 대개 자기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1847년, 빈 종합병원. 젊은 의사 이그나츠 세멜바이스는 이상한 숫자를 발견했다. 의사가 분만을 담당하는 제1병동의 산모 사망률은 18.3%, 조산사가 담당하는 제2병동은 그 절반도 안 되었다. 원인을 추적하다 그는 알아차렸다. 의사들이 시체 해부 직후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진찰하고 있었다. 염소 소독액으로 손을 씻게 했더니 사망률이 1.2%로 떨어졌다. 데이터는 명백했다. 하지만, 의학계는 거부했다. "신사의 손은 깨끗하다"는 것이 그 시대의 합의였고,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계급의 자존심이었지만, 합의는 합의였다. 세멜바이스는 점점 고립되었고,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2주 만에 사망했다. 손의 위생을 주장한 사람이, 위생이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죽었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 있다. 방은 어둡고, 얼굴 위로 스마트폰의 푸른 빛만 번진다. 엄지손가락이 자동으로 스크롤한다. 숏폼 영상이 넘어간다. 3초, 5초, 2초. 시계를 보면 47분이 지나 있다. 입안이 마르고 눈이 뻑뻑하다. 화면을 끄면 천장의 어둠이 너무 조용해서, 그 고요를 견디지 못해 다시 화면을 켠다. 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내 의지인지 알고리즘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47분 동안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택했을 뿐이다.




중국 출장에서 와이너리를 만나는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상업용 효모를 쓴다고 한다. 실험실에서 배양된 효모는 결과가 예측 가능하고, 해마다 일정한 맛을 보장한다. 소수의 양조자들은 다른 길을 택한다. 야생 효모. 포도밭의 흙과 공기 속에 자생하는 미생물이 알아서 발효를 시작하게 두는 것이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고, 어떤 해에는 실패하며, 예상치 못한 풍미가 나온다. 그런데 야생 효모로 빚은 와인에는 그 포도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양조자들은 이것을 테루아라고 부른다. 땅의 고유한 맛.


상업 효모는 남들이 검증한 삶의 방식과 닮아 있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어디서나 통한다. 다만 어디서나 같은 맛이 난다. 야생 효모의 발효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토양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그것을 신뢰하는 일이다. 쓴맛이 날 수도 있고, 발효가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빚어진 것은 대체할 수 없다. 누군가의 삶에 테루아가 생기는 것은 안전한 선택을 쌓아서가 아니라, 자기만의 발효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나답게 사는 법", "주체적 삶의 기술",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법"이 수십 권씩 꽂혀 있다. 모두 같은 메시지다. 남을 따르지 마라. 이 메시지를 따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남을 따르고 있다. "당신은 특별하다"를 수백만 명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산업. "남과 다르게 살라"는 동일한 조언을 모두에게 파는 산업. 주체적 삶을 아마존에서 구매하고 별점을 매기는 시대. "흐름을 따르지 마라"는 말 자체가 가장 강력한 흐름이 되어버렸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 있는가.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GPS도 나침반도 없이 태평양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했다. 방법이 이상하다. 항해사는 파도를 눈으로 보지 않았다. 배의 흔들림을 엉덩이로 느꼈다. 수평선을 32개 구역으로 나눈 별자리 지도가 머릿속에 있었고, 바다새의 비행 패턴과 구름 아래 섬이 반사하는 빛의 색깔까지 읽었다. 이 모든 것이 물리적 도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감각이었다. 수천 시간 바다 위에서 파도 하나하나가 살갗 위에 기록되었다. 외부 신호 없이도 방향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정보가 많아서가 아니라 감각이 깊어서였다. 현대인은 GPS를 따라 산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트렌드가 방향을, 타인의 평가가 속도를 정해준다. 신호가 끊기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폴리네시아 항해사와 우리의 차이는 도구의 유무가 아니다. 자기 몸을 신뢰하는 시간의 총량이다.


그러나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것과 자기 판단에 갇히는 것 사이에는 얇은 선이 있다. 라이너스 폴링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말년에 그는 비타민 C 대량 복용이 암을 치료한다고 확신했다. 열여섯 건의 이중맹검 연구가 그의 주장을 반박했지만, 끝내 자기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세멜바이스와 폴링. 둘 다 시대의 합의를 거부했고, 둘 다 자기 판단을 끝까지 밀었다. 한 사람은 옳았고, 한 사람은 틀렸다. 그 차이를 가른 것은 확신의 강도가 아니라 증거 앞에서의 태도였다. 세멜바이스는 데이터를 먼저 보고 판단을 세웠다. 폴링은 판단을 먼저 세우고 데이터를 자기 쪽으로 끌어맞추려 했다.


주체적 삶이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따르지 않겠다"는 결심은 "따르겠다"는 결심만큼이나 반사적일 수 있으니까. 장자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흐름을 따르는 것도 흐름이고 흐름을 거스르는 것도 흐름이라면, 흐름 아닌 것이 있는가.


어쩌면 진짜 주체성은 방향에 있지 않다. 감지에 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 아는 것. 이 판단이 내 안에서 나온 것인지, 밖에서 흘러들어온 것인지 느끼는 것. 면역 체계가 자기와 비(非) 자기를 식별하듯, 폴리네시아 항해사가 파도의 방향을 엉덩이로 읽듯, 양조자가 자기 포도밭의 흙 냄새를 아는 것처럼.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 감각이다. 의지는 방향을 정하지만, 감각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준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모두가 A라고 한다. 업계의 전문가도, 동료도, 타임라인의 모든 사람도. 그런데 안에서 무언가가 걸린다.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커피잔을 손으로 감싼다. 머그컵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번지는 동안, 그 온기만큼의 시간을 버텨본다. B를 선택한다. 맞는지는 모른다. 폴링처럼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3초의 멈춤 안에서, 아침 출근길에 사라져 있던 발바닥의 감촉이 잠깐 돌아온 것 같았다.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땅을 느끼는 것. 밖에서는 여전히 수백 명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빈 캘린더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