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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람 Dec 19. 2024

공간시리즈9, 잠깐, 거기서 멈춰봐

내 마음의 신호등 이야기

"야, 너 정말 이것도 못하니?"
회사 선배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튀어나왔을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그때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침에 본 딸아이의 웃는 얼굴.

"아빠, 오늘은 화내지 마세요!"
출근길에 장난처럼 던진 딸아이의 말이 마치 마법의 주문이 되어,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네, 제가 부족했네요. 다시 한번 해볼게요."

그날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평소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똑같이 날카롭게 되받아치고, 하루종일 기분 나빠하고, 집에 가서도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했겠죠.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방아쇠'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 실수로 옷에 흘린 커피 자국... 이런 순간들이 우리의 화약고에 불을 지피곤 합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 방아쇠와 폭발 사이에 아주 작은 순간이 있다는 거예요. 마치 신호등의 노란불처럼요.

며칠 전에는 마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을 보고 계산대에 섰는데, 앞사람이 영수증을 찾느라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 이 순간이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딸에게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곧바로 온 답장은 '피자!'였죠. 그러자 어느새 짜증은 사라지고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가 발을 밟았을 때도, 회의 중에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을 때도... 이제는 그 순간을 알아차립니다. 마치 게임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잠깐 멈추는 거죠.

"이건 진짜 화낼 일인가?"
"내가 지금 배고파서 더 예민한 건 아닐까?"
"이 사람도 나처럼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 그게 바로 제 마음속 신호등입니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어제도 버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통화하는데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가 괜히 민망해졌죠.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 모두 연습중이니까요.

재미있는 건, 이렇게 잠깐 멈추는 습관이 생기니까 의외의 선물들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화를 덜 내니까 위장병이 좋아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 더 이상 그날의 짜증을 가족에게 풀지 않게 되었죠.

딸아이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 요즘 웃는 게 더 멋있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 작은 순간들,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고르는 그 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제가 되었구나... 하고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올 그 순간들을 위해, 아침부터 마음속 신호등을 점검합니다. 빨간불, 노란불, 초록불. 이제는 이 신호등이 제 인생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되었네요.

"자, 오늘도 화이팅! 그리고 필요하다면... 잠깐, 거기서 멈춰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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