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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달리기는 죽음이다

by 하늘바람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묶는 순간부터 우리는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호흡이 가빠지고, 근육이 찢어지고, 관절이 마모된다. 달릴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부서진다.


이 파괴는 세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생물학적으로 달리기는 controlled destruction이다. 근섬유가 미세하게 파열되고, 연골이 닳아 없어지고, 심장은 한계에 도전한다. 의사들이 과도한 운동을 경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라톤 선수들의 무릎은 일반인보다 10년 빨리 늙는다.


정신적으로 달리기는 자아의 해체 과정이다. 처음 몇 킬로미터까지는 '나'라는 의식이 선명하다. 하지만 점점 페이스가 올라갈수록 생각이 흐려진다. 극한의 순간에는 '나'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오직 고통과 움직임만 남는다.


사회적으로 달리기는 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언어도, 예의도, 사회적 역할도 모두 벗어던진다. 원시 상태로 돌아간다.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고, 짐승처럼 본능에 의존한다. 수만 년 전 사냥하던 조상의 유전자가 깨어난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몸이 파괴될수록 더 강해진다. 근육이 찢어진 자리에 더 튼튼한 섬유가 자란다. 폐가 고통받을수록 더 많은 산소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초회복'이다. 죽음을 통과해야만 진화할 수 있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자아가 해체되는 순간 더 큰 의식이 깨어난다. '나'라는 작은 틀이 사라지자 우주 전체와 연결된다. 고통의 절정에서 황홀경을 경험한다. 러너스 하이는 일종의 near-death experience다.


사회적 죽음도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진 순간, 진짜 인간성을 발견한다. 가장 원시적일 때 가장 순수해진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달리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모든 진정한 성장은 어떤 형태의 죽음을 요구한다.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가 죽어야 한다. 꽃이 피려면 씨앗이 썩어야 한다. 어른이 되려면 아이가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순간은 사실 죽어있는 것이다. 안전지대에 머물고, 변화를 거부하고, 낡은 자아에 집착하는 것. 진짜 삶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달리기는 이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매 걸음마다 죽고, 매 호흡마다 다시 태어난다.


다시 그 충격적인 선언으로 돌아가자.


"달리기는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이제 이 말이 다르게 들린다. 죽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완전히 살아내는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살아있지만 죽어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살아있다. 달리기는 이 역설을 몸으로 배우는 수업이다.


매일 조금씩 죽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매일 완전히 새로 태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묻는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진짜 죽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 중에서, 죽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어떤 부분이 썩어서 새로운 생명의 거름이 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죽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연습장이 바로 아스팔트 위, 당신의 발밑에 펼쳐져 있다.


내일 아침 달리기를 나갈 때,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무엇을 죽이러 가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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