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역설
달리기는 제자리에 서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달리기는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동작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수천 번, 수만 번 같은 패턴을 되풀이할 뿐이다.
물리적 차원에서 달리는 사람을 위에서 보면 그는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한다. 몸의 기울기, 팔의 각도, 호흡의 리듬이 일정하다. 거리만 변할 뿐, 달리는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5km를 뛰든 42km를 뛰든 그의 폼은 동일하다.
심리적 차원에서 달리기는 현재에 머무는 연습이다. 과거의 실수나 미래의 불안을 생각하는 순간 페이스가 무너진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이 발걸음, 이 호흡에만 집중해야 한다. 달리면서 명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적 차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가장 빨리 움직이는 순간에 시간이 가장 천천히 흐른다. 러너스 하이에 빠진 순간, 몇 시간이 지나도 몇 분처럼 느껴진다. 속도와 시간이 반비례한다.
몸이 같은 동작을 반복할수록 마음은 더 자유로워진다. 물리적 패턴이 고정될수록 정신적 창의성이 폭발한다.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최고의 아이디어를 얻는 이유다. 니체는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걸으면서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에 머물수록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달리기의 단조로운 반복이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연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움직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정지'의 다른 형태라면? 지구도 자전하고 공전하면서 우주에서 같은 궤도를 그린다. 계절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끝없이 반복한다. 우리의 심장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똑같은 박동을 되풀이한다.
어쩌면 변화라는 것은 착각이고, 진짜 현실은 영원한 반복인지도 모른다. 달리기는 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몸으로 체험하는 행위인 셈이다.
다시 그 말로 돌아와 보자.
"달리기는 제자리에 서는 것이다."
달리기가 제자리에 서는 것이라는 건 달리기의 한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움직임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말이다.
가장 역동적인 순간에 가장 고요한 중심을 발견한다.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깊은 평화에 도달한다. 가장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가장 완전한 정적을 만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에서 '달리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목표들이, 혹시 당신을 제자리에 머물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는 그 일상이, 사실은 더 깊은 고요로 인도하는 길은 아닐까?
어쩌면 진정한 도착은 달리기를 멈추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달리면서도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올지 모른다.
오늘 길을 걸을 때,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