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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직원이 '멍청해' 보일 때

당신이 놓치고 있는 것

by 하늘바람


델리 오피스의 에어컨이 윙윙거리는 오후 3시. 나는 노트북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야. 또 이렇게 대충 만들어 왔어."


인도 현지 직원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며 속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한국에서라면 신입사원도 이것보다는 잘 만들 텐데. 데이터는 정리되지 않았고, 핵심 포인트는 묻혀 있었으며, 마감은 이미 어제였다.


'도대체 얘들은 왜 이렇게 일을 대충 할까? 멍청한 건가?'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혼자 끙끙대는 이방인.


나는 정말로 그들이 멍청해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을까?


1층: 표면에서 본 것 - "걔들은 대충, 나는 철저"


처음엔 단순했다. 한국식 기준으로 보면 모든 게 '대충'이었다.


미팅 시간? 30분은 기본으로 늦는다


보고서? 핵심 없이 장황하다


데드라인? 있으나 마나다


"Yes, yes" 하면서 정작 안 한다


매일 속이 터졌다. '내가 다 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번씩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2층: 패턴 인식 - "어라, 이거 어디서 본 건데?"


문득 깨달았다. 이 패턴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대학 팀플에서 "쟤들은 왜 이렇게 성의가 없지?"


첫 직장에서 "신입들은 정말 개념이 없어"


이직한 회사에서 "여기 문화는 너무 느슨해"


늘 남들이 문제였다. 늘 내가 더 열심히 했고, 늘 내 기준이 더 높았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다름'을 '틀림'으로만 해석하는 버릇이 있었던 걸까?


3층: 거울 속 그림자 -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


어느 날, 인도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You know what? You remind me of my father. Always worried, always rushing. In India, we say 'Everything will happen at the right time.'"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들의 '대충'은,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나


통제력을 잃은 나


느슨해진 나


실패할 수도 있는 나


한국에서 20년 넘게 "더 빨리, 더 완벽하게"를 외치며 살아온 나는, '대충'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그래서 그들의 여유가 나태로만 보였고, 그들의 유연함이 무책임으로만 느껴졌다.


4층: 문화의 충돌 - "당신의 'Normal'은 나의 'Crazy'"


인도에서 6개월째, 드디어 깨달았다.


한국의 '빨리빨리'


효율성 = 미덕


시간 = 돈


개인의 희생 = 조직의 성과


결과 > 과정


인도의 'Sab kuch milega (Everything will work out)'


관계 = 미덕


시간 = 순환


조화와 균형 = 지속가능성


과정 ≥ 결과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게임의 룰이었다.


한국에서 축구를 하던 선수가 인도에 와서 크리켓 경기장에 섰는데, 계속 손으로 공을 잡지 말라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5층: 시간의 관점 - "10년 후 뒤돌아보면"


'만약 10년 후의 내가 지금을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때 네가 '멍청하다'고 무시했던 그 인도 직원, 지금 글로벌 기업의 임원이야. 그리고 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한국식 추진력'? 그거 때문에 번아웃 와서 1년 쉬었잖아."


시간은 종종 우리의 확신을 뒤집는다.


지금 '비효율'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지속가능성'일 수 있고, 지금 '느림'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신중함'일 수 있다.


6층: 다른 가능성 - "만약 내가 그들처럼 일한다면?"


한 번은 실험을 해봤다. '인도식'으로 일하기.


데드라인에 목매지 않기


관계 구축에 시간 투자하기


차 마시며 수다 떨기


"It will be done" 하고 마음 놓기


결과는? 놀랍게도 일이 돌아갔다.


다르게 돌아갔을 뿐이다. 더 느렸지만 스트레스는 적었고, 결과물의 완성도는 낮았지만 팀워크는 좋아졌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와 일하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


7층: 통합 - "진짜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나의 렌즈"


이제 깨닫는다.


문제는 그들이 '멍청한' 게 아니라, 내가 하나의 렌즈로만 세상을 본다는 것.


한국식 성과주의 렌즈


속도전 렌즈


완벽주의 렌즈


우월주의 렌즈


이 렌즈들이 나쁜 건 아니다. 한국에서는 이것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델리에서 서울 렌즈만 쓰는 건, 선글라스 끼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작은 변화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했다:


아침 미팅에서: "Let me understand your perspective"라고 먼저 물었다


점심시간에: 인도 동료와 차이를 마시며 크리켓 이야기를 했다 (하나도 모르지만)


오후 보고서 검토: "왜 이렇게 했어?"가 아니라 "이렇게 한 이유가 뭐야?"라고 물었다


그리고 놀라운 답변들을 들었다:


"한국 스타일도 좋지만, 우리 클라이언트는 인도 사람이잖아요. 그들은 스토리가 있는 긴 보고서를 좋아해요."


"당신은 결과만 보는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팀이 얼마나 협력했는지도 중요해요."


아, 그들은 멍청한 게 아니었다. 다른 기준으로 똑똑했던 거다.


마치며: 우리 모두는 이방인


당신도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새 조직에서 "여기 사람들은 일을 못해"


다른 나라에서 "이 나라 사람들은 이해가 안 돼"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다 해야겠다"


그렇다면 잠깐 멈춰서 물어보자:


"정말 그들이 문제일까, 아니면 내 렌즈가 문제일까?"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는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방인의 진짜 지혜는 '그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의 렌즈를 추가하는 것'**이다.


서울 렌즈를 버리라는 게 아니다. 델리 렌즈도 하나 더 갖자는 거다.


그러면 세상이 두 배로 넓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멍청한 그들'이 '다르게 똑똑한 동료'로 보이기 시작한다.


P.S. 오늘도 인도 직원이 보고서를 늦게 냈다. 하지만 이번엔 짜증 대신 물었다. "What happened?" 그는 웃으며 말했다. "My daughter was sick. But don't worry, it's done now. And it's good." 그리고 정말로, 보고서는 좋았다. 느렸지만, 따뜻했다.


당신의 렌즈는 몇 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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