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억을 이어주는 공간
오늘날 도시는 점점 서로 닮은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새로운 상업시설과 문화공간은 세련된 이미지를 갖추고 있지만, 지역의 역사나 생활 방식과 관계없이 유사한 인테리어와 공간 구성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공간은 기능적으로는 편리해졌지만, 그 장소만이 지니고 있던 분위기와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동네 커뮤니티공간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역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더라도, 공간 자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계획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동네 커뮤니티공간에서 ‘로컬’은 단지 운영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공간계획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까.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라는 개념을 통해 장소가 공동체의 기억을 담는 매개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기억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간과 사물에 응축되어 남는다. 그리고 그 장소를 통해 세대 간에 이어진다. 재개발과 재건축 등 빠른 도시 변화 속에서 물리적 흔적이 사라질수록 이러한 기억의 장소는 공동체 정체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건축이 장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건축이론가 크리스티안 노르베르그-슐츠(Christian Norberg-Schulz)는 장소를 고유한 성격과 분위기를 지닌 총체적 환경으로 보았으며, 이를 ‘장소의 영혼(Genius Loci)’이라고 설명하였다.** 건축은 장소의 특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며, 설계는 백지 위에서 시작하는 창작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환경과 맥락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이 두 관점은 동네 커뮤니티공간을 바라보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지역의 오래된 주택과 창고, 골목의 상가와 같은 건물은 단순한 낡은 시설이 아니라 한 지역의 생활 방식과 관계의 구조가 축적된 공간자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을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기억과 장소성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이어지게 만드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여덟 번째 공간디자인 키워드로 ‘되살리기’를 제안한다. 이는 동네 커뮤니티공간이 지역의 기억과 생활을 다시 이어주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되살리기란 지역에 이미 존재하던 공간의 구조와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 축적된 생활의 기억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활동과 연결하는 공간 전략이다. 이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며, 전통적 이미지를 장식적으로 차용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기존 공간이 지닌 장소성과 기억을 읽어내어 그것을 오늘의 생활과 관계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말해, 되살리기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장소의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되살리기’는 실제 공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기존 건물의 어떤 요소를 남기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과거의 분위기와 오늘의 활동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을까. 다음에서는 도쿄의 시바노이에, 오사카의 에후에이살롱, 그리고 오카야마의 에홍노나야 사례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 Pierre Nora, 『기억의 장소』(전5권), 김인중·유희수 옮김, 나남, 2010.
** Christian Norberg-Schulz, 『실존, 공간, 건축』, 김광현 옮김, 태림문화사, 1997.
도쿄 미나토구의 한 주택가 골목. 나무로 마감된 작은 집 앞 툇마루에 사람들이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고, 산책을 나온 이웃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넨다. 열린 문 안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 툇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 집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며 하나의 생활 장면이 만들어진다. 골목과 집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동네의 시간이 이곳에 모인다. 이곳은 카페도 공공시설도 아니다. 동네 사람들의 일상이 모이는 작은 집, ‘시바노이에(芝の家)’다.
시바노이에는 도쿄 미나토구 시바(芝) 지역의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작은 커뮤니티 공간이다. 이름 그대로 ‘시바의 집’이라는 뜻으로,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 들러 잠시 머물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공간이다.
시바노이에는 도쿄 미나토구가 추진한 「시바 지역력 재발견 사업」* 의 거점 공간으로 2009년 조성되었다. 이 사업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과거 동네의 생활을 오늘의 도시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원래 사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의 1층을 임대해 마련되었으며, 2층은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미나토구와 게이오대학교, 그리고 지역 주민이 함께 운영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학 연구자와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시바노이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시설이 아니다. 차와 물이 제공되고 누구나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으며, 아이와 주민, 학생, 회사원,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이곳은 ‘무언가를 하러 오는 곳’이라기보다 동네 사람들이 잠시 들러 시간을 보내는 생활 공간에 가깝다. 단순한 커뮤니티 시설을 넘어 도시 속 공동체 문화를 실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작은 막과자 가게인 다가시야(駄菓子屋)가 보인다. 동네 아이들은 과자를 사기 위해 이곳을 찾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간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들이 잠시 머무는 사이 그 주변에서는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다가시야는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과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는 작은 장치로 작동한다.
다가시야를 지나면 하나의 큰 거실과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의 중심에는 일본 가정에서 흔히 사용되던 낮은 상인 차부다이(ちゃぶ台)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한 좌식 공간은 일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쇼와시대**의 생활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차부다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둘러앉는 풍경은 가족과 이웃이 함께 시간을 나누던 일상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건물 앞에는 일본 전통 주거에서 볼 수 있는 엔가와(縁側), 즉 툇마루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시 쉬어 간다. 엔가와는 실내 거실과 골목 사이에 위치하며 집과 거리 사이의 경계를 부드럽게 이어 준다. 내부의 생활이 골목으로 드러나고, 골목을 지나던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머물게 된다.
시바노이에는 과거의 건축 형태를 그대로 복원한 공간이 아니다. 대신 다가시야와 차부다이를 중심으로 한 좌식 공간, 그리고 엔가와와 같은 요소들을 통해 쇼와시대 동네의 생활 장면을 오늘의 도시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생활이 일상 속에서 다시 이어지도록 한다.
아이들이 과자를 사기 위해 들르고, 사람들이 차부다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툇마루에 앉아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속에서 동네의 일상은 다시 만들어진다. 시바노이에는 과거의 건물을 복원한 공간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공유하던 생활의 방식과 관계의 풍경을 오늘의 도시 속에서 다시 가능하게 하는 동네의 집이다.
* 시바 지역력 재발견 사업(芝地区地域力再発見事業)은 도쿄도 미나토구가 추진한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정책으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생활 기반의 장소를 통해 지역 공동체의 관계망을 회복하고자 시작된 사업이다. 시바노이에는 이러한 사업의 거점 공간으로 조성되었다.(출처: 港区芝地区総合支所, 「芝地区地域力再発見事業」 관련 자료)
** 쇼와시대(昭和時代)는 일본의 쇼와 천황 재위 기간(1926–1989)을 가리키며, 전후 일본에서 가족 중심의 좌식 생활과 동네 공동체 문화가 일상적으로 형성되었던 시기를 포함한다.
(시바노이에는 운영 여건의 변화로 기존 장소를 유지하기 어려워져, 인근 지역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오사카 아베노구의 왕자상점가(阿倍野王子商店街)에는 작은 커뮤니티 공간인 에후에이살롱(エフエーサロン)이 있다. ‘에후에이(FA)’는 ‘후레아이 아베노(ふれあい阿倍野)’의 약자로, 사람과 사람의 교류를 의미하는 ‘후레아이’와 지역 이름인 ‘아베노’를 결합해 만든 이름이다. 이곳은 상점가의 빈 점포를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으로, 지역 주민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교류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왕자상점가의 상점들은 대부분 비슷한 형태의 간판과 파사드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장식적인 외관을 강조한 경우도 많다. 그 사이에서 에후에이살롱의 외관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많은 일본의 상점가가 그렇듯 왕자상점가 역시 점차 상점 수가 줄어들고 빈 점포가 늘어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빈 공간을 단순히 방치하는 대신, 지역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사용하게 된 사례가 바로 에후에이살롱이다. 이 공간은 2007년 12월에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1층이 양품점, 2층이 주택으로 사용되던 상가 건물이었다.
외관만 보았을 때 이곳은 특별한 건축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상가 건물 가운데 하나처럼 보인다. 특히 1층은 고령자들이 이용하는 살롱 공간으로 사용된다. 커뮤니티 홀과 작은 주방, 배리어프리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상점가를 지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들러 앉을 수 있다는 점이 이 공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잠시 들러 쉴 수 있는 열린 구조가 상점가 속에서 작은 거실 같은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에후에이살롱의 외관과 내부는 교토의 전통 주택인 마치야(町家)를 떠올리게 한다. 목재 프레임과 간살, 그리고 내부에 사용된 목재 요소들은 전통 주거의 분위기를 연상시키지만, 전통 양식을 과장하기보다는 상점가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리노베이션 과정에서는 교토 마치야에서 가져온 문틀과 목재 부재를 재활용해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시설이라기보다 집과 같은 인상을 만들어 준다. 덕분에 이곳은 복지시설이라기보다 동네의 거실이나 작은 살롱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환경은 고령자들이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상점가의 거리와 실내 공간이 느슨하게 이어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스며들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거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형성된다.
2층에는 SAORI 직조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여러 대의 직조기와 실을 보관하는 선반, 작업 테이블이 놓여 있어 작은 공방과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노출된 목재 보와 미서기문, 목재 조명은 전통 목조 주택의 내부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실이 가지런히 놓인 선반과 직조기가 만들어 내는 풍경은 교토의 직조 공예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층에서 이루어지는 살롱 활동과 2층의 직조 작업은 하나의 생활공간처럼 이어지며, 과거 주거와 공방이 함께 존재하던 생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에후에이살롱이 되살린 것은 단순히 전통적인 건축 형식이 아니다. 마치야 주택이 만들어 내던 집 같은 분위기와 이웃 간의 일상의 관계가 이 공간 속에서 이어진다. 과거의 건축 형식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던 생활의 분위기를 오늘의 상점가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한 것이다.
특히 고령자들에게 마치야와 같은 주거 형식은 오랫동안 몸으로 경험해 온 생활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익숙한 공간의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정감을 느끼게 하고,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건네게 만든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이웃 간의 만남과 교류가 이곳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상가 건물을 리모델링한 공간이라도 사람들이 살아오며 체득한 생활의 기억을 불러낼 때, 공간은 단순한 시설을 넘어 공동체를 다시 연결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에후에이살롱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에홍노나야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카야마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한 뒤 작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1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주변에는 넓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농지 사이로 몇 채의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도착해서도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농가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카페 이름이 크게 표시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당 안쪽으로 들어서자 일본식 목조 주택과 창고 건물이 보였다. 외부에서 볼 때는 평범한 농가의 창고처럼 보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실내는 작은 그림책 카페였다. 벽면에는 다양한 그림책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다. 오래된 목조 기둥과 보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은 높고 고풍스러웠다. 목재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색감과 작은 장식들이 어우러지면서 공간 전체가 매우 아늑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래된 목조 창고가 이렇게 그림책 공간으로 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낮에는 이곳이 카페로 운영된다. 나는 카레를 주문해 늦은 점심을 먹으며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운영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날 저녁 이곳에서 작은 음악 공연이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테이블이 조금 정리되고 기타와 마이크가 설치되었다. 포크송과 밴드 공연이 이어졌고, 공연 중간에는 한국에서 온 방문자라는 소개를 받기도 했다. 낯선 방문자였지만 공간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곳은 단순한 카페라기보다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만들어 가는 작은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이 공간의 이야기는 옆에 있는 오래된 고택에서 시작된다. 신세키치(しんせきんち)라는 이름은 일본어 구어 표현으로 ‘친척집’을 뜻한다. 실제로 이 집은 에홍노나야 운영자인 후지모토 마리코의 남편의 백모가 살던 집이었다. 약 100년이 넘은 이 일본식 목조 주택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후계자가 없어 빈집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점점 낡아 갔고 철거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을 철거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만 약 200만 엔이 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주변 지인들과 지역 주민들은 집을 철거하는 대신 함께 고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전기 인입과 건축재료 구입 등에 약 120만 엔이 들었고, 목사와 전기공, 토목공 등 12명의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리폼 작업을 진행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공간이 바로 신세키치이다.
리폼에 참여한 사람들은 건물수리 작업에만 참여했고, 이후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운영과 관리는 지역주민 모임인 신덴라쿠자(新田楽座)가 맡고 있다. 이 모임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현재 신세키치는 지역 모임이나 공연, 행사 등을 위한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신세키치 옆에는 농기구를 보관하던 창고가 하나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창고를 ‘나야(納屋)’라고 부른다. 이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 바로 에홍노나야(絵本の納屋)이다. ‘에홍(絵本)’은 그림책을 의미하고, ‘나야(納屋)’는 창고를 의미한다. 이름 그대로 ‘그림책 창고’라는 뜻이다.
이 공간은 후지모토 마리코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약 2년에 걸쳐 만든 공간이다. 오래된 창고를 리모델링해 카페와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꾸었다. 내부의 테이블과 가구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 많으며, 바닥공사 역시 마리코가 직접 시공했다. 공간 내부는 침엽수 목재를 사용해 마감했으며, 오래된 창고의 목조 구조와 천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덕분에 공간에는 오래된 건물이 지닌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이 공간이 만들어진 계기는 후지모토 마리코의 개인적인 취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동화를 쓰고 그림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모은 수백 권의 그림책을 한 공간에 모아 두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책 카페가 만들어졌다. 에홍노나야는 2010년에 문을 열었다.
에홍노나야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4~5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면에는 다양한 그림책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책은 일정한 주제를 정해 정기적으로 교체된다. 이곳에 모여 있는 그림책은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과 ‘치유’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어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책들이다. 이러한 책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가 된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육아응원 마마카페 ‘무민 마마(ムーミンママ)’이다. 이 프로그램은 NPO법인 마치즈카이주쿠(まちづかい塾)가 주최하며,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도록 마련된 모임이다. 그림책 읽기, 작은 세미나, 파스텔 아트 등의 활동이 이루어지며 육아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이외에도 음악 공연이나 작은 모임도 열리기도 한다. 밤에는 ‘노래 나야(歌納屋)’와 같은 음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지역 주민들이 악기를 가져와 함께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자리다. 내가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참여했던 공연도 바로 이러한 모임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이 카페 공간을 중심으로 이어지면서 이곳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된다.
신세키치와 에홍노나야는 철거될 뻔했던 고택과 창고를 고쳐 다시 사용해 만든 공간이다. 고택은 행사와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고, 창고는 그림책 카페가 되었다. 두 공간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지만 하나의 생활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오래된 집과 창고는 사람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면서 새로운 생활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공간을 되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던 공간의 구조와 기억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 새로운 활동과 관계를 담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집과 창고는 지역 사람들의 협력 속에서 다시 사용되는 장소가 되었고, 그 안에서는 새로운 만남과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건물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지역의 건축과 생활,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처럼 기존 공간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활동이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동네 커뮤니티공간을 계획하는 하나의 방식인 ‘되살리기’라 할 수 있다.
되살리기란 오래된 건물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생활의 장면과 공간의 분위기를 오늘의 도시 속에서 다시 불러오는 공간 전략이다.
앞에서 살펴본 시바노이에, 에후에이살롱, 에홍노나야는 서로 다른 도시와 조건 속에 놓여 있지만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이 공간들은 과거의 건물을 복원하거나 전통 형식을 재현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대신 생활의 모습과 공간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도쿄의 시바노이에는 다가시야와 차부다이, 엔가와와 같은 요소를 통해 쇼와시대 동네의 생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오사카의 에후에이살롱은 마치야 주택을 연상시키는 공간의 분위기 속에서 고령자들이 편안하게 머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살롱을 만들었다. 오카야마의 에홍노나야는 고택 옆 창고를 개조해 그림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세 공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과거의 생활 기억을 공간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하는 전략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공간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건축 형식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만들어 가던 생활의 방식이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과자를 사러 들르며 이웃과 마주치고, 책을 매개로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일상의 모습들이 반복되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는 이러한 장소를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라는 의미다. 시바노이에와 에후에이살롱, 에홍노나야와 같은 공간 역시 사람들이 기억과 경험을 나누며 관계를 만들어 가는 동네의 ‘기억 장소’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빠른 변화 속에서 오래된 생활 방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만들 때, 과거의 삶의 방식은 다른 형태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동네 커뮤니티 공간에서의 되살리기는 건축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기억을 공간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