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은 줄곧 모범생으로, 교사로 십 년 넘게 나름 열심히 일해왔다고 자부하던 내게, 오슬로에서의 첫 학기는 그간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가는 과정이었다. 수업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잃어가는 자존심과 더불어 자존감마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 모든 건 ‘벽’ 맛 가득한 영어 때문. 강의, 그룹 토의, 에세이 과제 등 모든 게 영어로 이루어지는 매일이 긴장과 쪼그라듦의 연속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 삼십 퍼센트라도 알아먹으면 용하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맨 뒤로 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어서 나를 숨기고 싶다. 뒷자리 메이트, 리키와 스티븐이 벌써 와 있다. 우리는 다소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들. 애써 밝고 활발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손들고 질문은커녕 그룹 디스커션도 벅차다. 쾌활한 브라질리언 E가 아니기에, 영어를 잘하던 못하던 교수의 말에 “I don't think so.”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한다. 에고고.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거겠지? 졸업은 할 수 있겠지?...
공포감은 매 강의마다 있는 그룹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특히 더 심해진다. 첫 학기 첫 번째 프레젠테이션을 그야말로 덜덜 떨면서 준비했다. 네 명이 파트를 분배하고 각자의 슬라이드를 만들어 발표하는 형식이다. '말문이 막혀버리면 어떡하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버벅거리면 어떡하지?’란 생각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에게는 하루 만에 끝날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나에겐 근 2주의 시간이 필요한 거대 프로젝트였다.
첫 발표를 앞둔 어느 일요일 오후, 그룹원들과 모여 각자의 파트를 확인하고 합을 맞추는 자리다. 지난 이 주간 매달려온 내 파트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거 뭐지?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지? 지난했던 고생에 마음이 서럽게 데워졌나 보다.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영어권 학생이라면 한두 시간 준비하면 될 것에 나는 꼬박 이 주를 바쳤다. 그럼에도 발표의 수준을 담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쳤나 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많겠나? 낭패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극을 수모로 받아들이는 못난 내가 보인다. 그럴수록 더 움츠러든다.
발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라고. 그간 학생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려면 핵심 내용을 잘 간추려, 확실히 이해한 후 자연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말’을 못하겠는 거다. 매번 혀끝에서 미끄러지는 영어, 급기야 멘트를 죄다 외우게 된다. 그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서.
교사로 10년 넘게 일했다는 건 어쩌면 매일 프레젠테이션을 해왔다는 거다. 그런데도 그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그때가 어쩌면 나에겐 배움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낯선 환경에서 다시 학생이 되고 보니, 그것도 부진 학생이 되고 보니, 실감 나게 역지사지되는 것들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