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트빌리시 공항에서 오슬로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 오슬로의 뵨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고3을 대상으로 한 자신의 사회인류학 시간에 <한국 사회와 문화>를 주제로 수업을 해달라는 제안이다. 인터뷰 당시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 실제로 요청을 한 거다. 자기 수업을 몇 번이나 와서 보라고, 잘되는 수업과 잘되지 못한 수업을 가감 없이 공개하던 그가 고마웠었다. 더군다나 노르웨이어를 못하는 나를 배려해 뵨과 학생들 모두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이런 뵨이 고마워서라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 내 서툰 영어를 확인했음에도 기꺼이 제안했다는 건, 뭐랄까 진심이란 거다. 부담스럽지만, 잘하고 싶다.
노르웨이 고3과 한국 고3들의 삶의 풍경을 비교하는 수업을 준비했다. 해마다 5월이면 오슬로 곳곳은 점프 슈트를 입은 학생 무리들로 넘쳐난다. 빨간색, 파란색 등 갖가지 색깔들의 향연이다. 대입 자격시험과 졸업을 앞둔 고3 루스Russ들이다. 5월 한 달 동안 버스나 승합차를 빌려 전국을 누비며 먹고 마시며 온갖 사고를 쳐도 용서해 주는 문화가 있다. 성인이 되기 직전 온갖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사회가 베풀어주는 일종의 관용 문화다. 한국의 고3들이 수시와 수능이라는 대입의 벽 앞에서 극도로 민감해질 때, 이곳 루스들은 5월 한 달을 미친 듯이 즐기는 셈이다. 특이한 건, 그 직후 바로 대입시험을 치른다는 거다. 입시지옥으로 대표되는 우리네 고3들과 비교하니 놀라는 눈치다.
한국의 학교 급식 사진을 보여주니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따뜻한 음식이 정찬으로 나오니 그럴 수밖에. 밥과 국, 반찬 세 가지, 후식으로 구성된 우리네 급식과 달리 이곳은 간단한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끝낸다. 일명 마트파케Matpakke 문화다. 식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으면 끝. 허기를 면할 정도의 간단한 점심을 먹도록 장려하는 문화라고 한다. 한국에선 인사마저 ‘식사하셨어요?’라고 하니, 아이들이 웃는다. 먹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의 이면에,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지난 20세기 이후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과 들, 바다를 뒤지며 먹을거리로 승화시켜 온 한국 사람들에 대해 말이다. 다행히 학생들 반응이 좋다. 질문이 쏟아진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묻는 예의까지 보인다. 이 날은 노르웨이에 와서 가장 뿌듯했던 날 중 하나다. 수업 후 다 같이 찍은 사진과 비디오로 그때를 회상하면 여전히 뿌듯하다.
다음 학기 가을 무렵, 뵨이 한 번 더 수업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고2 대상의 역사 시간에 <한국 전쟁>에 대하여 알려달라고 한다. 학생들은 이미 학기 내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공부했고, 냉전 체제를 배우고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관련 사료를 직접 분석하고,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팟캐스트 만들기를 수행평가로 막 실시한 직후였다. 해당 시기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아이들에게 비전공 교과인 역사를 가르친다는 게 무척 신경 쓰였다. 떨리는 마음과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의 심정으로 △△고등학교로 향했다. 눈 쌓인 길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은 두 반을 대상으로 수업을 한다. 그런데 이거 뭐지? 학생들과의 문답으로 자연스레 진행된 사회인류학 수업에 비해, 이번 수업에선 학생들이 듣고만 있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내가 말려들어간다. 점점 더 말리기 시작한다. ‘잘 될 때가 있으면 또 안 될 때도 있지’라며 넘어가는 게 상책.
석사 논문이 최종 통과된 후, 그 소식을 전하고자 인터뷰이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곧장 뵨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한국과 노르웨이에서 동시에 화상으로 수업을 연결해 보잔다. 적극적인 교사답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나, 곧장 답장하지 못했다. 복직 후 학교생활 적응이 무척 힘들었고, 영어가 큰 장벽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계속 고민만 하다 답장 시기를 놓쳐버렸다. 수업을 어떻게 조직할지, 기술적 문제와 같은 돌발변수에 어떻게 대응할지, 시차 조절은 어떻게 할지 등 안 될 이유만을 찾고 있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내가 보인다. 실수와 돌발변수에 조금 더 너그러운 내가 될 때, 응답을 보내야겠다. 미처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의 사회와 문화를 탐색하는 수업을 해보자고 먼저 제안해야지. 무엇보다 뵨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