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닌 곳에서 자라서인지 외국인과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주일에 한 번 영어회화 수업을 해주신 뉴질랜드 원어민 선생님이 학창 시절 마주친 외국인의 전부다. 주위엔 죄다 한국인뿐,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감수성이랄 게 없었다. 섬 같은 반도국가, 그것도 지방 소도시에서 자란 내게 이십 대 초반의 호주 여행은 쇼킹 그 자체였다. 저마다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물리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원래 넓은 곳이구나. 여태 내가 좁게 살아온 거구나. 피부색뿐 아니라 말이 이렇게나 다르다니. 다름을 자각한 순간, 마음속 세계는 한 뼘 자라날 수밖에 없다. 그 무렵이었을까? 외국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단 바람을 품었던 때가?
노르웨이 인구의 십 분의 일, 50만 명이 오슬로에 살고 있다. 한국에 비하면 소도시 수준의 인구 규모지만, 인구다양성 측면에선 서울을 압도한다. 백인뿐 아니라 흑인, 아랍인, 황인, 또는 그 사이 수많은 스펙트럼의 피부색과 생김새, 언어를 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크링쇼 기숙사와 블린던 캠퍼스를 오고 가는 지상철은 그야말로 혼종이다. 중동사람, 인도사람 등등 가지각색이다. 나 역시 이곳의 혼종적 요소! 저 멀리 동아시아에서 왔으니.
1960년대 석유 발견 이전, 가난했던 노르웨이 사람들이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이주했듯,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또 누군가는 종교적인 이유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스칸디나비아의 왼쪽 끝, 노르웨이로 모여들었다. 이곳의 아시안 마트는 주로 베트남계가, 채소와 과일가게는 터키계가, 음식점은 타이계가 대를 이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이곳에 살고 있다.
오슬로에서, 나는 이주민이자 학생으로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 내게 또 하나의 정체성이 추가되었다.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다양성이 기본값인 이 사회의 결을 다채롭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이주 배경을 지닌 친구들을 만나며, 다양성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더해가고 있다. 차별과 평등에 대한 민감성 또한 길러지는 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