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좋아하긴 하지만 딱히 추구하는 스타일이랄 게 없던 내게 지난 삼 년은 무언가가 쌓인 시기다. 옷에 대한 무언가가. 그 시작은 오슬로에서 만난 네덜란드 친구 벤테. 짧은 머리에 큰 안경, 닥터마틴 류의 단화와 물 빠진 청바지, 미쏘니 풍의 패턴 조끼로 자칫 아저씨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묘하게 쿨 해 보이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베를린 스타일의 힙스터. 그들은 주로 빈티지를 잘 조합해서 자기만의 멋을 드러낸다. 새 옷을 사기엔 호주머니가 궁색하고, SPA 브랜드의 정형화된 옷은 용서가 안 된다. 채리티샵과 빈티지샵, 주말마다 열리는 플리 마켓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예사롭지 않은 패턴과 색감, 세월의 흔적이 스며있는 옷에특유의 ‘흔하지 않음’이 묻어있다. 시대와 국적, 성별 불문의 빈티지 옷들은 믹스매치를 통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베를린을 넘어 북유럽에도 빈티지 문화가 꽤 발달해 있다. 나라는 부유하지만 높은 물가와 세금으로 국민은 평범하게 산다는 게 공통점. 나 역시 오슬로에 살며 그 문화에 눈을 떴다. 봄이면 주말마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리는 플리 마켓부터 채리티샵 Fretex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잘만 고르면 노르딕 패턴 핸드메이드 스웨터와 ‘아리비아 핀란드’ 커피 잔 세트를 건질 수 있다.
빈티지 천국 헬싱키에서는 성지 순례하듯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며 진귀한 아이템들을 구경했다. 여름철 주말이면 곳곳의 공원마다 플리 마켓이 열린다. 전문 상인이든 주민이든 제 물건을 가지고 나와 판다. 크고 작은 좌판이 펼쳐진다. 사람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는 축제의 장, 그야말로 남녀노소의 장. 한여름 헬싱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생동감 넘치는 순간이었다.
급기야 한국으로 들어올 때, 책은 버려도 스웨터와 그릇은 고이 챙겨 왔다. 내겐 확실히 책 보다 옷이다. 빈티지는 다양한 색감과 패턴, 디자인을 접할 수 있기에 재미있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어느새 내 취향의 스펙트럼이 조금 더 넓혀져 있다. 기성복의 빳빳하게 정제된 세련됨 보다 옛것이 주는 멋을 알아버렸다. 이렇게 입다 보니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갈래가 생긴 것만 같다. 나는 특이한 패턴과 쨍한 색깔, 오버사이즈와 원피스를 주로 산다. 대중없이 입고 싶은 대로 입다 보면 상하의 전부 남성용 옷일 때도 있다. 어느새 단골이 되어 네 벌 사면 한 벌 값은 제해주시는 단골 가게도 생겼다. 그렇게 사도 새 옷 한 벌 값을 넘지 않는다.
자기 취향과 소재, 기존 옷들과의 조화를 고려해 잘만 고르면 그야말로 망망대해 속 월척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탁 후 햇빛에 말려놓은 옷들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풍성해진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왠지 기분 좋다. 낡은 것에서 멋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