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만난 친구 필립은, 심리학에 이어 교육학으로, 학사과정을 두 번째 밟고 있다. 자라온 과정에서 교육의 힘을 크게 느꼈기에 교육 정책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홍콩계 이민자 가정의 자녀로 중학교 때까지 엄청난 말썽꾸러기였던 필립. 수업 중 교사에게 대드는 상황은 비일비재하고, 누가 더 막 나가는 짓을 하는가가 또래 사이의 인정 수단인 양 나쁜 짓에 몰두했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수평적이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교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학창 시절에, 한 선생님과의 만남, 영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큰 사건이었다. 처음으로 받은 과제 칭찬과 선생님의 자세한 피드백은 그로 하여금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깨닫게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한 학기 동안 영국에서 공부한 경험은 자신감을 맛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은 국가 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다. 인구 500만의 작은 나라 노르웨이를 벗어나 각국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졌고, 영어 실력도 덩달아 늘었다. 이때의 성취감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막바지 시절, 대입 자격을 얻기 위해 하루 6시간씩 맹렬히 공부했다. 이십 대 중반, 현재의 필립은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앎에 대해 진지하게 파고드는 사교적인 학생이 되어 있다.
만약 노르웨이도 한국처럼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뒤늦게 철든 필립이 오늘날의 필립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고입 단계에서 어그러졌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노르웨이 사회가 사람을 기다려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성원들 제각기 환대받을 장소를 찾게끔 말이다. ‘선별’보다 ‘역량’에 초점을 맞춘, 노르웨이 교육 환경의 특징을 살펴보자.
우선, 필립처럼 대학을 여러 번 다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학비가 무료이며, 월 100만 원 정도의 생활비(로네카센, Lånekassen)를 국가로부터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전공한 비교국제교육학 석사 과정에도 40대 후반의 신입생이 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다 뜻한 바가 있어 두 번째 석사 과정을 밟는다고 한다. 일정 정도의 성적이 확보될 경우, 생활비 대출금은 졸업 후 60%의 금액만 월 2%의 이자로 20년 간 갚으면 된다.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허덕이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또한, 대학 간 서열이 없다. 전공별로 특화된 학교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평준화되어 있다. 대학 입학률은 2024년 기준 약 37% 정도이며, 입시 경쟁은 한국에 비해 치열하지 않다. 대학을 졸업해야만 인정받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와 버스 기사의 임금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로 ‘급’을 나누지 않기에, 지위 경쟁이 한국에 비해 덜하다.
‘졸업 후 무슨 일 할 거야?’란 나의 질문에 그곳에서 만난 대다수의 학생들은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찾아볼 예정이다.’라고 답했다. 나의 질문 자체가 그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취업을 위한 공부’보다 ‘공부를 통한 취업’의 개념이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서 자기를 알아간다는 의미인 걸까? 필립처럼 공부가 맞으면 더 할 수 있고, 아니면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국가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시민학교(FolkehØgskole), 일반계 고등학교 내 성인 학습자를 위한 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만약 필립이 한국에 사는 홍콩계 이민자 가정의 자녀라면, 그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까? 스무 살 이전의 능력에 기반해서, 아마 제 역량을 발휘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걸러질 것이다. 대학 간판으로 모든 것이 일거에 설명되는 사회, 전 국민이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는 사회 속 필립의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가엾어진다.
필립의 당당한 자신감과 포부가 부럽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 중에도 제2, 제3의 필립들이 많을 텐데…. 그들을 믿고 기다려 주기에는, 한국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초등 단계에서 뒤처지면, 계속 뒤처지게 되고, 열패감만을 맛본 체, 공교육 12년을 떠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교육에 대한 가능성을 그릴 수 있을까? 어쩌면 이곳은 온 국민을 학교 불신자, 교육 불신자로 만드는 곳이 아닐까? 능력주의의 탈을 쓰고 개인의 ‘노오력’만 강요하는 사회, 가차 없이 걷어차이는 순간 ‘나락’으로 빠지는 사회, 사다리 걷어차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