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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우리 Jul 23. 2020

여직원을 나오라고 했다고요?

옛 직장생활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부하직원이 나를 위해 해준 리액션이다.


딱 8년 전 일이다. 부서장이 장애가 났다고 새벽 1시 30분쯤 부서원을 집합시켰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1차에서 내가 받지 못해서 2차 연락처로 기재되어 있던 신랑 휴대폰 번호로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은 신랑은 나를 깨웠다.


“회사에서 전화 왔어. 받아봐.”

큰일이 났나 싶었다.

“죄송하지만 센터로 지금 당장 들어오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가요?”

“몰라요. 그냥 지금 당장 들어오래요.”

그 당시 시스템 운영 업무를 맡지 않았던 나는 다시 물어봤다.

“저도 들어오라고 하신 거 맞으세요?”

‘네! 다 들어오라고 하셔서 지금 다 연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회사에 들어가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건 뭐지?’


10여명 직원이 택시를 타고 센터에 집합했다. 멀게는 오산에서 오신 분도 있었다. 택시비가 그 당시 7~8만 원 나왔다고 했다. 센터에 들어가니 술을 먹고 얼굴이 빨간 부서장이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애가 났는데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해당 솔루션 담당 영업과 담당 직원이 앞에 서서 고성을 듣고 있었다.


부서장은 센터로 들어온 나를 그제야 봤다.

살짝 나를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대리! 말이 돼? 다 원인을 모른단다.”


장비는 이중화가 되어 있었고, 한쪽 장비에 이상이 있어서 리부팅이 되었다. 원래는 한쪽 장비가 이상이 있으면, 자동으로 스탠바이 장비로 전환돼야 하는데 전환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일시적으로 장비만 리부팅되고 모든 직원을 소집할 정도의 장애상태는 아니었다. 별도의 디스크(저장장치)가 없는 장비라 리부팅되는 과정에서 메모리(휘발성 저장장치)에 저장된 에러 로그(에러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 정보)가 날아갔다.


장애가 나면 즉시 원인을 파악하고 조치해야 한다. 하지만 장애 영향도 정도에 따라 원인 분석의 시점을 조정은 가능하다.


우리는 새벽에 모두 센터로 뛰어들어갔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볼 빨간 부서장의 꼬장을 보고 회사에 있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이때 어느 특정 임계치를 넘으니 화도 나지 않고 그저 웃음만 나왔다. 사람이 뇌로 이해하지 못할 범주를 겪으면 이렇게 되는가 싶었다. 화도 어느 정도 개선의 여지가 있을 때 난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워졌다. 센터는 그렇게 큰 폭풍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다.


부서장의 행동은 일시적인 장비의 문제여도 느슨하게 대응하지 말고, 장애의 원인을 즉시 찾으려고 해야 하는 큰 교훈을 주셨으며, 센터의 기상과 군기 아닌 군기를 한번 잡은 것으로 이해받았다.


대신 오산에 살고 있어 택시비가 7~8만 원 나온 직원은 장애가 나면 오지 않거나 야근하고 집에 새벽에 들어갈 일 있으면 회사 근처 모텔에서 자라는 가이드 아닌 가이드가 나왔다.


회사 생활하면서 각자가 겪은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를 말하라고 하면 모두 한 트럭은 될 것이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말할 때 한 번도 부서장이 여직원까지 나오라고 했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이 일이 있었던 8년이라는 시간 뒤에 남자 부하직원에서 순간 나온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 시간에 여직원을 나오라고 할 수 있죠?”


여직원을 나오게 했다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다.

술 먹은 부서장이 장애를 빌미로 새벽에 모든 직원을 나오게 한 것이 문제다. 난 오히려 그때 부서장이 남녀 구별 없이 막대해 주셔서 남자 많은 조직에서 부서원들과 같이 욕(?)하면서 일을 잘할 수 있었다.


남자만 근무했던 전산센터에 성별 상관없이 나를 뽑아주셔서 센터 최초의 전문직을 수행하는 여직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센터에 서무 아닌 IT직무로 여직원이 일한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한 프로젝트 리더를 맡겨 주셔서 성장할 기회도 얻었다. 힘든 부분도 있지만 감사한 부분도 있다.


오히려 다른 동료들은 고생하는데 나만 여직원이라고 일찍 들어가라고 했으면 맘이 불편했을 것이다.  핵심적인 업무에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배려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원치 않은 배려는 배려가 아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여직원이니까 주말에 나오지 마. 밤늦게 일하지 마!’라고 말해 주는 상사를 만나지 못해 맘껏 일할 수 있었고, 그만큼 좋은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센터 업무 특성도 있지만 야근과 주말 작업이 비일비재했다. 야근이 자랑은 아니다. 그때는 그랬다. 그렇다고 조직에서 유리천정과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별개의 문제다.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나를 맞춰준다고 얘기하다 보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고 이해한다. 그래도 2020년에도 젊은 친구한테 이런 얘기를 들으니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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