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보드 & 자유 관광
테이네 스키장으로 향하는 길은 정말로 눈 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쌓인 눈조차 흙이라곤 하나 없이 하얗기만 했다.
새하얀 눈 위에 다시 흰눈이 쌓이고 또 쌓이고 덮씌워진 길이었다.
기억하는 눈길이란,
언제나 밟히고 더러워져 진흙탕이 섞여 분탕질 쳐놓은 길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마주치는 정말 새하얀 벽을 마주할 때면,
현실감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우와, 우와."
"대박!"
진심으로 그 소리 밖에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우리들은 눈이라곤 제대로 못 보고 자란 부산촌놈, 촌년들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할 무렵 눈 앞에 새하얀 슬로프가 펼쳐졌다.
주말이 무색하게 널럴하기만 한 슬로프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한국에서 베이스로 이용하던 곳은 주말이면 와글와글 오글오글 개미떼가 몰려다니듯
줄지어 30분이고 1시간이고 대기타야 겨우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던 곳이었다.
그것도 제법 좋은 설질과 현대적 시스템으로 이름 높은 스키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람!
이렇게나 넓은데!
펜스 하나 없는데.
그냥 막막 달려도 사람과 부딪힐 위험이라곤 없는데!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급자 코스만 해도 6km 에 이른다더니 척 보기에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내 주차를 하고 서둘러 장비를 꺼내 들었다.
도착한 시간이 3시이니 대략 3시간 정도만 쉬지 않고 빡시게 돌아도 괜찮을 듯 싶었다.
심지어 우리가 주차한 지역이 슬로프 중간 지역과 연결되어 있어 눈밭을 기어 올라가
의도치 않게 도둑 보딩(?) 도 한 번 하고 매표소로 내려갈 수 있었다.
"우와아, 진짜 파우더다."
스으으윽.
정설되지 않은 부드럽게 흘러 내리는 자연설의 느낌이란!
대부분 딱딱하게 뭉쳐 있던 정설된 눈에서만 라이딩 하다가
밀가루처럼 흐르는 파우더 설질이었다.
강원도에서도 1년에 어쩌다 한 두번, 시기가 정말 잘 맞아야 탈 수 있던 눈이었다.
스르르륵. 뭉쳐 있는 눈도 좀 더 자세를 낮추면 얼마든지 깨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흑, 이 느낌 좋아!
"야야!!! 빨리 타자!!!"
양껏 들뜬 기분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음, 언니 잠깐만요."
여러가지 면에서 나보다 훨씬 일본어를 잘하는 토끼가 곤란한 표정을 하고 불렀다.
(그녀는 일본어 전공에 2년을 일본에서 살았다고 했다. 읽고 쓰고 대화가 현지인 수준이었다.)
"지금 사면 3,000엔, 30분 후에 끊으면 2,000엔 이래요."
일본 스키장의 요금 체계를 보니 한국과는 그 시스템이 달랐다.
한국은 주간권, 후야권, 야간권 대략 이런 시스템이 일반적이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물론 종일권이라는 시스템도 있지만 아무때고 와서 편한 만큼만 타고 가는
2시간권, 3시간권, 4시간권 등 자신이 리프트 통과한 시점부터
시간이 계산되는 꽤 합리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그중 야간 타임이 오후 4시부터 시작이었고
그 야간 타임 티켓은 3시 30분부터 판매 된다는 거였다.
대략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1인 1,000엔씩 3,000엔을 절약할 수 있으니 우리로서는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잠시 사진 찍으면서 놀다가 2시간 권 끊자."
"네."
어차피 우리는 다 가렸고 원래 사진 찍으며 온갖 포즈를 취하는 걸 절대 부끄러워 하는 족속이 아니었으니까.
테이네 스키장은 "카모리 관광 주식회사"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였다.
그래서 카모리라는 회사 로고가 찍힌 RF 카드를 리프트 카드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카드를 처음 살 때는 보증금 500엔을 추가로 납부해야 하고 돌아갈 때 반납하면 500엔을 돌려 받는 시스템이었다.
일본 스키장에서 장비를 렌탈할 경우
하루 렌탈 비용이 거의 5000엔 수준이었다.
몇 시간만 렌탈할 경우에는 어떻게 세분화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꽤 비싼 금액이었던 지라 지레 겁먹은 우리는 각자 장비를 가져왔다.
에어부산의 수화물 규정이 개인 20kg 무게에 포함하여 보드&스키장비 한 셋트당 편도 1만원 비용으로 이용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동은 렌트카로 할 것이니 무게 부담은 적었다.
그렇다면 개인 장비를 가져 가는게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출발 직전 토끼와 황군이 바인딩 세팅하는 걸
기다리는 중이었다.
설레고 또 설레는 순간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대로 휘날리는 새하얀 알갱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후 4시도 안되었는데 벌써 해가 지는 이 곳.
마치 먼 곳을 떠나 정말로 내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누가 뭐래도 좋았다.
길도 낯설고 땅도 낯설어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꺾이는지
바닥이 어떻게 굴곡이 잡혀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훅 꺼지는 부분에서는 앉으면 되는 거였고
길은 몰라도 아래로 내려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정말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쓸려 내려 가는 설질에 흥분이 차올랐다.
여간해선 보드 타다가 소리 지르지 않지만,
"이얏호~~~"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넓고 좋아서.
이렇게 신나게 전속력으로 질주한 게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새하얀 눈밭에 왔으니까 굴러 주는 건 당연하지요.
그저 신나서 어린아이처럼 소리 지르고 뒹굴어도 누구 하나 뭐라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해가 저무는 건 순식간이었다.
겨우 오후 4시가 지났을 뿐인데 일몰이 찾아왔다.
태양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추위도 찾아왔다.
메마른 자작 나무가 겨울의 상징인 것처럼 리프트 위에 앉은 몸은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내일은 핫팩을 붙이고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반복하고 너무 어두워서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의 북해도 원정 첫번째 스키장은 끝이 났다.
첫날은 그저 살짝 맛만 보고 가자 하는 정도였지만 생각보다
설질이 너무 좋고 즐거워서 내일을 생각지 않고 무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황군, 피곤해서 운전 가능하겠어?"
내가 놀리듯 물었을 때
"그럼 누나가 하실래요?"
황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난 죽을 듯이 피곤하거든. 하지만 죽고 싶진 않으니까 절대 졸지 마."
"키득키득. 내가 할까요?"
뒤에서 토끼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나도 황군도 절대 핸들을 맡길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을 확실히 위험했다.
낮에 살짝 녹았던 눈은 해가 져서 얼어 빙판길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괜찮을 수 있었던 건 렌트카에 VDC 기능(차체 자세 제어)과
스노우 타이어가 장착된 차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테이네 스키장도 이렇게나 만족도가 높았는데 내일 가는 루스츠는 얼마나 좋을까
한가득 기대를 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