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진을 갖고 시작하는 것과 영감에의해 시작되는 일. 초안은 어디서 올까
우선, 내가 제일 쉽게(?) 자주 하는 창작. 글쓰기에서 창작을 먼저 생각해보고싶다.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내기(쓰기)위해 먼저 목표와 계획을 잘 세우면 될까?
아니.. 글쓰기 계획 세우다가 내 글쓰는 낙을 잃을 뻔 했다. 구체적으로 계획할수록 글 쓰기가 어려워졌던 것.
사건의 발단은 "하고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관련 없는 일화들이 막 나오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는 내 글쓰기 선생님의 피드백이었다. 다시본 내 글은 참 산만했다. 주제와 소재가 여럿이고, 나조차도 이게 여기로 간다고? 싶은 관련 없는 일들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피드백을 받고 글을 좀 추스려(?) 보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개의 글이 됐다. 갑자기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다음번 글을 쓸 때부터는 글을 쓰기 전에 주제와 소재를 미리 정해놓자고 생각했다.
양식도 만들었다. 주제 — 소재 — 전개 순서.
근데 그러자니 쓰는 재미가 없었다. 잘 풀릴 리가 있나. 내 글쓰기 버튼은 ‘혼돈’인데. 혼돈때문에 쓰고 혼돈 속에서 가닥을 잡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거 였는데 난.
누가 당황스럽게 하면, 화가나면, 내 스스로에게 실망하면, 어떤 화두가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으면 써왔다.
근데 갑자기 계획된 틀 속에서 쓰자니 손이 나가질 않았다. 그러다 힘겹게 집중해서 쓰기 시작하면 글 안에서 다시 내가 마구 튀는 탱탱볼 처럼 튀어다녔다. 20년전 과거로도 갔다가 - 여러 사람들의 말도 얼마나 잘 떠오르는지. 그래서 그냥 초안은 나오는대로 막 쓰고, 거기서 주제를 골라잡아 새로 편집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냥 되는대로 쓰는 생활을 즐기던 어느날 문득 설거지하다(설거지나 샤워는 기회인가. 물소리가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안이라는 말 있잖아. 첫번째 완성본이란 말이 아니라 계획없이 혼돈 그 자체를 막~ 써도 되는 거! 그런게 원래 초안아닐까?' 이거 나만 몰랐던 거 아니야? 원래 그런 거 아냐? 그래서 관련 개념들을 찾아보기로했다. 지난 날 비슷한 고민을 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었을 더 현명했을 이들의 얘기를.
무려 아리스토텔레스 님이 정의하신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 ‘잠재태’개념이란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나 존재의 상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눴다고하는데.
잠재태 (dynamis)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
예: 씨앗 속에는 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 있음.
현실태 (energeia 또는 entelecheia) 그 가능성이 실제로 실현된 상태.
예: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된 상태.
창작의 시작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 무한히 얽혀 있는 잠재태로부터 라는 것. 잠재태를 현실태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토대라고 봤다. 어쩌면 글쓰기의 ‘혼돈 속 탐구 단계’는 아직 하나의 형태로 결정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형태로 발현될 수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잠재태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 초안인 잠재태를 단순한 ‘미완성’으로 평가절하하지 않고 그 자체가 창작의 본질적인 힘이라고 말했을 수 있겠다.
요런느낌.
완성본: 현실태 (정해진 하나의 모습)
혼돈 속 탐구: 잠재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
문학이론가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정의한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란 개념이 있다. 질서가 뒤집히고,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간섭하는 상태. 발산적 초안은 바로 이런 다성(多聲)의 장이라는 것. 주제와 서사 구조가 확립되기 전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글의 생명력을 심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며.
이렇게 위안삼고(?)나니 초안은 심리적 부담을 줄여 창작 흐름에 들어가게 하는 좋은 것이고, ‘잘 써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오는 내면의 검열을 없애주고, 무의식을 꺼내는 아주 좋은 작업이구나. 진실한 나를 드러내는 좋은 도구이고, 훌륭한 글이 될 가능성을 품은 잠재태인 것.
쨋든 결론.
1.초안은 첫 버전의 글이 아니라 탐구를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2.초안은 나를 위해 쓰되, 누구에게 보여주지말자. (^^.. 애초부터 초안으로 글쓰기 수업 피드백 받은 게 잘못..?_)
3.첫번째 완성한 글처럼 들리는 초안말고 좀 더 좋은 이름 없을라나. 우선은 Dra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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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반사같은 하트누르기(?)는 하지않아요. 나누고싶은 의견은 너무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