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아네트를 위한 변명,
프랑스 베르사유

사진/여기에 가니 앙투아네트를 편들고 싶어 졌어.

by 모래파파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내가 가장 최근에 찾은 외국이야. 2019년 11월 출장으로 두 나라를 찾았어. 그리고 코로나19가 닥쳤고 해외는커녕 다른 도를 가기도 힘들어졌지. 출장이지만 마땅히 하루 정도는(할 수 있다면 더 많이) 여행처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소중한 하루를 보낸 곳은 프랑스 베르사유였어. 불어를 독어보다도 못하고(3화-슬로베니아 피란편 참조) 프랑스에 대한 각별한 끌림이 없는 나이지만 어쩌다 보니 2017년에 두 번이나 파리 출장을 다녀왔어. 그때마다 오가며 그리고 틈틈이 파리를 돌아다녔어. 2년 새 세 번째 프랑스를 찾으니 이번엔 다른 데를 가고 싶더라고. 어차피 파리 아니면 근처여야 하지만. 그래서 택한 곳이 베르사유야. 베르사유에 간 게 처음은 아니야. 2002년 유럽 배낭여행 때 갔었어. 헌데 베르사유궁에 들어가지 않았어. 정원에서 자전거만 타다 왔어. 그때는 무슨 허세였는지 ‘굳이 궁에 들어가야 하나’ 싶더라고. 여행 막바지라 좀 지치기도 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쇤브룬궁전을 봤으니 베르사유궁은 안 봐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 두 곳은 닮긴 했지만 그래도 베르사유까지 가놓고 안 보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는 행동이었던 듯해.


그런 후회를 했던 터라 이번엔 오롯이 베르사유궁에 시간을 쏟기로 맘먹었지. 입구를 통과하면 나오는 메인 궁전뿐만 아니라 정원 곳곳을 돌아보겠다고 생각했어. 17년 만에 다시 왔는데 새삼 놀랐어. 정말 넓더라. 나는 박물관이나 역사적 건물에 가는 것을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지는 않아. 하지만 확실히 어릴 때보다는 역사 유적들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 나이가 들수록 유적지를 가면 그곳에서 삶을 살아낸 이들에게 잠시나마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땐 ‘여기가 베르사유 궁전이래’ 였다면 지금은 ‘아 여기를 루이14세가 거닐었겠구나. 여기서 넓은 정원을 바라봤겠구나’라고 상상을 해. 고등학교 때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면 별 감흥이 없지만 성인이 돼서 가면 더 재밌는 것도 비슷한 감정일 거야.


DSC07351.JPG 옛날이나 2002년이나 2019년이나 커다란 베르사유궁전

DSC07336.JPG 화려한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연회홀에서 내다보이는 널따란 정원을 매일 봤을 궁중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베르사유 궁전을 돌아보고 향한 곳은 지도의 오른쪽 그랑 트리아농 프티 트리아농이었어.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왕비의 오두막’이었지. 거기가 지도상으로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이었거든. 왕비의 오두막까지 가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아 위쪽 끝을 찍고 돌아오는 여정을 짰지.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적대던 사람들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드물더라고. 하늘과 맞닿을 듯이 키가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길을 아무도 없이 혼자 걷기도 했어. 베르사유 정원에는 숲이 정말 커. 사람의 손길이 항상 닿는 듯 잘 정돈돼 있지만 워낙 나무가 커서 맘먹고 숨으면 아무도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왕가(王家)의 많은 비사(祕史)들을 숲은 알고 있을 것 같아.

DSC07355.JPG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가지를 맞댄 숲. 왕실의 온갖 비밀을 품고 있을 것 같은 곳.


왕비의 오두막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만들었다는 곳이야. 찾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 없었는데 가서야 배경을 알게 됐어. 프랑스 전통 가옥 여러 채와 작은 호수가 어우러져 있어. 프랑스 전통 가옥이라지만 왕비를 위해 만들어서인지, 아님 유럽 배경의 동화 속 그림들에 익숙해서인지 정말 동화 속 집들 같았어. 호수는 크진 않지만 아담한 창문과 계단, 나무를 거울처럼 비춰내. 호수 물이 일렁일수록 집과 나무들도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곤 하지. 호수 중앙에는 마을과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탑이 세워져 있어. 그곳에서 앙투아네트와 하녀 어쩌면 친구들은 '오늘은 저기서 놀아야지, 오늘은 저 숲 속에 놀러가볼까' 수다를 떨었을 것 같아. 이 곳은 가이드북과 지도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어떤 지도에서는 ‘왕비의 촌락’으로 표기하기도 해. 가옥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모여있는 걸로 봐선 그 말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해. 왕비의 오두막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에 머무르던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고 해.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놀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DSC07374.JPG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만들었다는 왕비의 촌락.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탑. 앙투아네트의 놀이터였을까 앙투아네트를 감시하기 위한 초소였을까.
DSC07376.JPG 왕비의 촌락에 있는 집들. 어린 시절 동화책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암튼 나에겐 동화 속 집처럼 보였어.
DSC07382.JPG 집은 나무로 지어졌어. 나무 냄새가 좋았을 것 같아.
DSC07380.JPG 숨바꼭질을 하기 좋았을 것 같아. 기둥 뒤에 숨었다가 들키면 잔디밭을 가로질러 도망가기도 하고.

그동안 앙투아네트를 상상하면 화려한 궁전 홀에서 감당 안 되는 드레스를 입은 채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떠올렸어. 실제로는 소박함이 담뿍한 자기만의 동화 마을에서 놀았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어. 그러면서 그녀가 했다는 망언, 빵을 달라는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그 말을 다시금 생각했어. 그 말을 실제 했는지 안 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지만 실제로 했다고 하면, 어쩌면 그녀는 화려한 궁중 생활에 취해 현실 감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동화 마을에서 걱정 없이 지내다 보니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았던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 나라도 여기서 일주일만 지내면 유년 시절 감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허리를 꽉 쪼이는 드레스 때문에 온 몸이 쑤셨을 궁전보다는 햇빛과 호수와 나무 그리고 아마도 동물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더 행복했을 거야. 나 하나의 일탈 따위 모두 모른 척해줄 것 같은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것도 좋았겠지.

DSC07377.JPG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는데 저런 풍경에 새소리가 들리면 괜히 기분이 좋았을 듯해.


앞서 나이가 들수록 역사 현장을 찾으면 그곳에서 살았던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잘하게 된다고 했지. 베르사유왕비의 촌락에서 나는 잠시 앙투아네트를 가슴 속에 그렸어.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는 워낙 논란이 많으니 감히 내가 평할 문제는 아닐 거야. 정말 그녀가 민중들에게 해악을 끼친 건지, 민중을 달래고자 희생양 삼은 건지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상 잘 모르지. 요즘 우리 현실을 보면 아마 그 당시를 살았어도 몰랐을 것 같기도 해. 다만 나는 그녀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숲 속 마을에서, 그녀가 뛰놀았을 호숫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가 방긋 웃었을 그 시절을 꿈속에서라도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