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벽을 넘을 뻔,
네팔 카트만두

사진/안나푸르나 북벽. 네팔 출장의 목적이었어. 카트만두는 기착지.

by 모래파파

그들은 나를 ‘알반동’이라 불렀어. 웃으면서.

“어릴 때 공부도 열심히 했을 텐데 좋은 머리 조국 위해 사용하셔야지 그렇게 쓰면 되겠슴니까”

이 말도 웃으면서 했어. 난 그들에게 내 직업과 소속을 말해준 적이 없어. 아마 출장에 동행했던 다른 누군가가 알려준 거 같아. 아마도 곧 언급될 '신 선생님'이 가르쳐줬을 거라 추측해. 난 그들 누군가에게 물었어.


"알반동의 뜻이 반동 중에 핵심 뭐 그런 건가요?"

"아주 잘 아시네요. 역시 조선민족이라 머리가 좋은가 봅니다"


날 알반동이라 부르던 그들은 네팔 카트만두에 있는 옥류관 직원들이었어. 옥류관.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 유럽 등에서 운영하는 식당이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옥류관의 음식 가격은 비싸. 특히 네팔이나 동남아 등의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 따라서 옥류관이 노리는 주요 손님은 한국인들이야. 해외에서 그 돈을 주고 그 음식을 먹을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 말곤 별로 없거든.


2009년 가을과 2010년 봄 출장으로 네팔을 찾았어. 목적지는 안나푸르나였어.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 같은 히말라야 산들을 오가려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얼마간 머무르게 되지. 카트만두에서 묶었던 숙소 바로 앞에 옥류관이 있었어. 당시 출장에는 나이가 꽤 많은 어르신이 함께 했어. 그분이 신 선생님이야. 중장년이 대부분 그러하듯 해외에 나가서도 한식을 많이 찾으셨지. 숙소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인 옥류관은 신 선생님 취향에 제격이었고 출장 일행들의 발걸음은 여러 번 그곳으로 향했어.

옥류관의 운영 방식은 어디든 비슷해. 식당이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종업원들이 무대에서 춤과 공연을 펼쳐. 한국인들 귀에도 익숙한 ‘반갑습니다’ 같은 노래가 식당 안에 울려 퍼지지. 종업원들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테이블 등을 돌아다니며 아코디언 연주를 하기도 해. 아코디언이란 악기 자체가 나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정겨운 느낌을 줘. 하루 이틀 장사해본 게 아니니 한국 노래들을 연주해주는 경우도 많아. 공연 시간이 아니라도 종업원들은 자연스레 테이블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네. 북한인에 대한 호기심이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비슷할 테니 손님들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있어. 훈훈한 대화든 살벌한 대화든 거기서 주로 나오기 마련이야. ‘고향 떠나 와서 고생한다’는 격려를 건넬 때면 ‘선생님 감사합니다’란 인사가 돌아오지. 술이 좀 들어가고 김일성 김정일 욕 나오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얼어붙기도 하고.


인원만 열 명 가까이 됐던 우리 출장 일행은 옥류관 입장에서는 놓치기 싫은 VIP 고객이었을 거야. 방문할 때마다 종업원들이 다가와 덕담이든 농담이든 건네며 친근감을 표시하는 건 당연한 영업 전략이었을 거고. 그중 한 명은 날 남동생 대하듯 했어. 알반동이라 처음 날 부른 사람(이하 북한누나)이지. 북한누나 옆에는 앳된 얼굴로 아코디언 연주를 하던 친구가 있었어. 능수능란하게 남한 어르신들과 농담을 주고받던 북한누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항상 수줍은 얼굴로 그냥 웃기만 하다 갔어. A라 부를게.


2010년 봄 카트만두를 다시 찾았어. 신 선생님을 비롯한 출장단 멤버는 6개월여 전과 비슷했고 숙소도 동일했기에 옥류관 역시 가지 않을 수 없었지. 사실 그때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벌어진 직후라 북한 식당을 찾는 게 꺼려지기도 했어. 하지만 신 선생님은 카트만두에서 도무지 먹을 게 없다며 옥류관으로 우리를 이끄셨어. 북한누나와 A 모두 그대로 일하고 있었어. 작년보다는 경험이 쌓였는지 A는 한층 살가워져 있었어.


"또 뵙습니다. 선생님"

"반가워. 보고 싶었어. 네가 좋아하는 '모래파파(나. 물론 그때는 저렇게 안 불렀지)'도 또 같이 왔어."


순간 A의 귓불은 빨개졌어. 난 흠칫 놀랐어. 어르신의 농이 과했는지 A는 붉어진 얼굴로 왼쪽 가슴에 달린 이름표만 만지작거렸어. 난 신 선생님이 장난을 쳤다 생각하면서도 궁금하기도 했어.


"선생님, A가 절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

"딱 봐도 알지. 나 정도 인생 살면 그냥 봐도 알아. 허허허"


옥류관에 종업원이 A만 있는 건 아닌데 언젠가부터 우리 일행이 찾으면 항상 A가 서빙을 했어. 날 남동생 대하듯 한 북한누나는 관리자급인지 여러 테이블을 수시로 돌아다녔지만 A는 우리 테이블을 전담 마크하는 듯했어. 그때마다 신 선생님은 A와 날 소재로 농담을 건네셨어. 분단 현실이 엄연한데 말이지.


"A씨, 여기 모래파파 어때?"

"좋은 분 같습니다. 다만 알반동이신 게 좀..."


저녁 식사를 위해 찾은 어느 날, 그날도 A가 서빙을 했어. 근데 식사가 중간쯤 됐을 때 A는 우리 테이블에 있다가 다른 종업원에게 귓속말을 듣더니 급히 달려갔어. 옥류관에는 룸 형태로 된 독립된 식사 공간도 있어.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더라고. 북한누나가 오더니 "당(아마도 조선노동당이겠지?)에서 높은 분들이 오셔서 거기로 갔슴니다"라고 했어. 우리가 식당을 나설 때까지 A는 보이지 않았어. 취기가 오르신 신 선생님은 날 보시더니 한 마디 툭 던지셨어.


"나 아까 그 친구 저기 룸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아, 네 저도."

"구해주고 싶지?"

"................"


옥류관에는 노래방도 있어. 노래방에 가도 종업원들이 들어와. 음식을 가져다주고 노래 번호를 말하면 입력해줘. 바깥 테이블에서 공연을 하는 것마냥 자신들이 노래를 부르기도 해. 독립된 공간이니까 마냥 신나는 노래 말고 발라드풍의 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더라. 그때 알게 된 노래가 '심장에 남는 사랑'.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는데 국내에서도 리메이크가 됐더라고. 우리가 갔을 때 A도 들어와 있었어. 시간이 지나 예약된 노래가 하나도 없어졌어. A가 날 보더니 물었어.


"이 노래 아심니까?"


그러더니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번호를 누르고 시작 버튼을 누르더라. 노래는 버즈의 '남자를 몰라'였어. 내 나이대 남자에게 모르는 게 이상한 노래이니 일단 불렀어. A는 기억할까. 자기가 6개월 전에도 나한테 저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는 걸. 맞아. 2009년 가을에도 우리는 한 번 옥류관 노래방을 갔었고 그때도 A는 나에게 '남자를 몰라' 노래를 부탁했어.


가장 좋아하는 남한 노래가 그거였을까.

그래서 그 노래가 듣고 싶었던 걸까.

내가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었던 걸까.

내가 부르는 '남자를 몰라'가 듣고 싶었던 걸까.


노래방 중간에 나와 화장실로 가는 길엔 주문을 받는 카운터가 있었어. 벽면엔 달력이 걸려 있더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어. 카운터를 지키던 종업원이 날 보더니 "우리 당에서 나온 달력임니다. 궁금하심니까. 보여드릴까요?"라고 말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이미 달력을 떼더라고. 난 달력을 한 장씩 넘겼어. 내용은 아주 심플했어. 달마다 배경 사진만 다를 뿐 하나같이 그들의 위대한 령도자를 찬양하는 내용이었어. 그때 그 북한누나가 오더니 "달력 참 잘 만들지 않았슴니까"라고 물었어.


"안 힘드세요?"

"뭐가 말임니까?"

"그냥 해외에서 일하고... 북한 사람으로..."

"힘들다니요. 우리에겐 따뜻한 당이 있으니까 전혀 힘들지 않슴니다."


그날부터였던 거 같아. A는 더 이상 우리 테이블 담당을 하지 않았어. 신 선생님은 역정을 내셨어.


"쟤들이 일부러 막는 거야. 너랑 더 가까워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설마요."


귀국을 하루 앞둔 날 신 선생님과 나는 둘이서 옥류관을 찾았어. 신 선생님은 그 북한누나가 오자 다짜고짜 말했어.


"우리 내일이면 한국으로 떠나."

"그러시군요. 일은 잘 마치셨나요."

"응, 그건 그렇고 그 있잖아 A 좀 불러줘.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하려고 그래."


북한누나는 머뭇거리더니 "알겠슴니다" 하곤 어디론가 갔어. A가 왔어. 참 오랜만이었어. 신 선생님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피했어.


"저 내일 한국으로 가요."

"네, 얘기 들었슴니다. 일 잘 마치셨다고."

"네..."

"그럼 돌아가서도 건강하시고.."

".............................."

".............................."


그 말을 건넨 후 A는 아무 말 없이 조금 더 테이블에 머물렀어. 언젠가처럼 수줍은 듯 이름표만 만지작거렸어. 난 그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봤어. 그렇게 이름표를 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 같아.


그해 12월 우연히 들은 소식, 카트만두 옥류관 지점장이 인도로 망명했다는 뉴스였어.


P.S.- 이 에피소드가 있던 건 2009년과 2010년이야. 그리고 2년 후쯤인가 내 개인 SNS에 이걸 각색해 토막 소설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어. 2009년과 2010년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글을 썼고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기행문을 작성했어. 그러다 보니 문제가 하나 있음을 고백할게. 2012년 토막 소설을 쓸 때 약간의 상상을 가미하기도 했는데, 그런 상태에서 8년이 지나 다시 글을 쓰니 뭐가 허구였고 뭐가 실제 있었던 일인지 좀 헷갈린다는 거야. 물론 위 글 대부분은 사실이야. 하지만 100%라고 확신을 못하겠는 건 내가 실제 겪은 일과 내가 상상한 일이 머릿속에서 공존하다 보니 상상조차 사실이라고 믿게 된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어. 어쨌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팩트와 상상을 구분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 그래서 상상인 것들은 제외했어.

확실한 건 감정은 상상이 아니야. 감정은 기억이지.


S7303736.JPG 카트만두 시내의 몇 안 되는 관광지 중 하나인 화장터. 카트만두는 히말라야를 위해 하루하루 소모되는 듯 지친 표정을 가진 도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