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그리고 김지영 남편
이런 제목 함부로 쓰면 안 되나요
이 글을 올리는 2020년 11월 기준 39개월 된 아들과 20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은 어제 얘기일 수도 있고 1년 전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때론 2년째 반복되는 얘기일 수도 있고요.
1년 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그 전에는 소설도 읽었다. 영화 엔딩에 부분에 적힌 김지영의 생일과 내 아내의 생일은 같다. 나는 82년생. 영화관을 나서며 나는 “나는 김지영이랑 출생연도가 같고 부인은 생일이 똑같네”라고 했다. 그야말로 웃자고 한 소리다. 허나 돌아온 말은 “재밌어?”였다.
<82년생 김지영>은 분명 의미 있는 소설이고 영화다. 다만 보는 이에게 위로보다 먼저 분노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있다. 물론 이 콘텐츠가 지닌 사회적 가치는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난 얼마 후 아내는 나에게 소감을 물었다. ‘대답 잘해야 되는데’라는 긴장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복수의 인물에게서 짠함을 느꼈고 그때마다 울컥했어.”
먼저 김지영, '결국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출구를 찾았을 텐데'라며 의사에게 털어놓을 때. 사실 저 말은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인이라면 살다가 벽에 부딪히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여러 번 되뇌는 자책이다. 결국 내 탓이구나 하면서 한숨을 내쉬는. 김지영은 여성으로서 아마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 더 많았을 거다.
김지영 엄마, 딸의 상태를 본 엄마는 자신을 희생해 딸을 돕기로 결심한다. 여성 한 명이 온전히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려면 또 다른 누군가(그게 여자든 남자든)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다면 돈이 필요하다. 남자의 성공에도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게 대부분이다. 개인의 성공에 또 다른 개인의 희생이 필요한 상황은 분명 안타깝다. 지금까지 그 희생의 대상이 주로 여성이었던 건 더 안타깝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김지영의 딸 아영이가 38세가 됐을 때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제일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김지영 남편,
이쪽저쪽 눈치 보는 모습에 울컥했다.
소설 읽을 때는 딱히 남편에 감정이입하지 않았는데 영화 속 공유의 표정을 보니... 너무 공감. 아내가 우는 틈타 나도 몰래 울었다.
82년생 김지영도 52년생 김지영도,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남편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화를 남편에게 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