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피란 꼭대기에서 바라본 바다와 마을.
이번 여행담은 2화 끝자락에 나오는 2013년 슬로베니아에서 겪은 소소한 추억이야. 번외 편 정도랄까.
예정에 없던 류블랴나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피란으로 향했어. 사실 슬로베니아에서 여행지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피란보다는 블레드 호수야. 맑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예배당이 마치 그림과 같아서 인상적이지. 류블랴나에서 1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에 있어서 가기도 쉽고. 블레드를 가본 것도 아닌데 가장 유명한 그곳을 거르고 피란을 간 건 햇빛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었던 거 같아. 바닷가에 가면 햇빛을 만날 가능성이 클 거 같다는 근거 없는 기대랄까.
오스트리아에서 비만 맞고 돌아다녔던 터라 햇빛을 만나 선글라스를 쓰고 싶다는 욕심(2화 참고) 이외에도 소망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내가 나온 사진을 한 장 찍고 싶다'는 거였어. 혼자 여행을 다니니 내가 나온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종종 기념 삼아 누군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해. 허나 그때는 슬로베니아에 오기 전날까지는 비가 와서 그럴 부탁을 할 여유가 없었어. 나뿐만 아니라 우산 쓰고 걸음을 재촉하는 도시민에게도 이방인의 사진을 찍어줄 한가함은 별로 없었겠지.
햇빛과 '내가 나온 사진'. 두 가지 바람을 가지고 오른 피란 가는 버스. 버스에 앉고 보니 나를 찍어달라고 부탁할 한국인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왕이면 이성. 이왕이면 나이도 비슷했으면. 이왕이면 좀 매력적이기도 했으면. 헛되진 않으나 가능성이 크진 않은 상상을 하며 버스에 타는 이들을 한 명씩 관찰하기 시작했어. 그래 맞아. 사진을 찍어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는 드라마 같은 인연을 찾고 싶다는 상상으로 커져 있었어. 사실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야 그냥 현장에서 아무에게나 부탁해도 되는 거니까.
슬로베니아가 한국인들에게 아주 핫한 여행지는 아니었음에도 버스에는 몇 명의 한국인이 타더라고. 버스가 출발한 지 10여분 지나 상상을 실현해줄 후보가 탔어. 그의 목적지도 나와 같길 바라며 이런저런 상상들을 했어. 바로 말을 걸진 않았어. 버스는 피란으로 가는 길 중간에 블레드에 서기로 돼있었거든.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니 적잖은 사람들이 블레드에서 내릴 거라는 생각에 일단 지켜보기로 했지. 안타깝게도 첫 번째 후보는 블레드에서 내렸어.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후보가 탔어. 옷차림새, 눈빛, 입술의 움직임이 딱 한국인이었어. 피란까지 1시간 반. 그 길에는 딱히 유명한 곳이 없었기에 목적지가 같을 확률도 컸고 이왕이면 버스에서부터 친해지면 좋겠다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문제는 딱 하나.
미안해, 별로 끌리는 스타일은 아니더라고. 잠시 고민을 했어. 본래 한국인을 찾았던 목적을 떠올렸지. 사진을 찍어달라고 편하게 부탁할 사람을 만나는 것. 그래, 제1 목적이 그거였으니 외모가 뭐 그리 상관이겠어. 여기가 시도 때도 없이 한국인을 마주치는 파리나 프라하도 아닌 슬로베니아임을 감안한다면 오늘 한국인을 또 만날 가능성, 그리 크지 않아. 근데 또 막 끌리지는 않는단 말이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자. 다만 버스에서 말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말을 걸자. 이거였어. 버스에서 말을 걸면 내릴 때까지 계속 대화를 해야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거든. 버스는 계속 피란으로 향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이 나와 목적지가 같을 거라는 건 명확해 보였지.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난 준비한 대로 내리자마자 그에게 다가가 전통의 그 멘트를 날렸어.
"한국분이시죠?"
"......................."
이런, 대답을 안 하더라고. 당황한 눈빛이 보였어. 더 당황한 건 나였고. 버스에서 한 시간여를 지켜보면서 저분이 한국인이 아닐 거라는 상상은 정말 조금도 안 했거든. 대답 없이 눈이 휘둥그레진 그에게 나는 어디서 왔는지 물었어. 근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웨아 유 프롬?"이라고 안 하고 "보헤아 커멘 지?"라고 했어.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아냐고. 딱 저 정도 해. 상대방은 이젠 황당한 표정이었어. 그래도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인지했으니 그쪽에서 먼저 얘기를 하더라고. 자기 대만인이라고. 분명 한국인이었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래도 기다려온 시간과 '사진을 찍겠다'는 목적을 떠올리며 오늘 이 곳 피란을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물었어. 그쪽에서 그러자고 했어.
그렇게 하루 여행을 같이 했어. 골목을 같이 돌아다녔고 밥도 같이 먹었어. 사진도 부탁해서 찍었지.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버스도 같이 탔어. 같이 타놓고 따로 앉는 건 이상하니 같이 앉았어. 3시간 동안 같이 앉으니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눴어. 반가웠던 태양이 물러가고 버스 창밖은 어두워졌고 버스 안도 어두워졌어. 피곤했는지 그는 잠이 들었고 부스스 깨더니 '자기 머리 무겁지 않은지' 묻더라.
큰 사건은 없었어. 다음 날 다시 만나지도 않았고. 말했듯이 당장 말 걸고픈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미안해, 찌질해서. 아니 사실 별로 안 미안해. 나만 그런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