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잘츠부르크 호엔잘츠부르크성.
내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 영향이 컸어. 아버지는 나와 형을 데리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어. 지금은 포털에 검색만 하면 가는 길부터 맛집까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시절에 여행은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 집에 자가용도 없던 그때, 아버지는 새로운 어딘가에 자녀들을 데려가기 위해 사전 답사를 하시곤 했어.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대중교통은 열악했으니, 아버지는 하루에 다섯 대밖에 안 다니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오가는 루트를 먼저 공부하셨던 거야. 어린 자녀를 위한 실천적 노력뿐만이 아니었어. 대학교 2학년이 된 2002년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던 그때. 모아놓은 돈만으로는 여행 경비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선뜻 거금을 내어주셨어.
"이 돈 아낀다고 우리 집 빚 다 갚는 거 아니고 이 돈 쓴다고 우리 집 망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맘껏 즐기고 와"
좀 멋있지? 물질적 도움보다도 아버지가 전한 심정적 지원은 이후로도 여행의 멋을 알아가는데 바탕이 된 것 같아. 언젠가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해외여행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뭔가 보답하고픈 마음이 들어서였지. 실천으로 옮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많은 자식들이 그렇듯이 효도해야지 마음먹기는 쉽지만 막상 실행하려면 이런저런 핑계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2016년 이미 30대 중반이 된 나와 6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부모님은 함께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났어. 목적지는 체코와 오스트리아. 체코는 내가 2002년에 가봤고 오스트리아는 2화에 얘기했듯 2002년과 2013년 갔던 곳이야.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내가 가보니 좋았더라'는 자식의 말에 부모님은 혹하셨어. 자식이 혼자 다녀온 곳을 부모와 함께 다시 간다는 그 자체에도 낭만을 느끼셨던 것 같기도 해. 개인적으로는 오스트리아를 두 번 찾고도 아직 발을 들여놓지 못한 잘츠부르크를 이번에는 기필코 가겠단 욕망이 생기기도 했고.
일주일간의 여행 일정은 프라하-잘츠부르크-할슈타트-비엔나. 대략 그랬어. 어머니는 자식이 인도하는 여행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아하셨어. 잘츠부르크에서 한 번 비가 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날씨도 좋았지. 각자의 가슴속에 좋은 추억으로 새길 여행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아버지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체감한 시간이기도 했어.
먼저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가 승무원에게 반말을 하시는 게 적잖은 충격이었어.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승무원에게 아무렇지 않게 반말하는 사람은 뭔가 늙은 사람이거든.
자유여행이니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게 일상이었어. 그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목적지까지 몇 정거장 걸리는지' 물으셨어.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니 대답하기가 힘들었어. 그냥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리면 되잖아. 우리가 보통 지하철을 타고 어딜 갈 때 거기까지 몇 정거장인지 세면서 가지는 않은데 아버지는 왜 그러셨을까.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를 탔을 때였어. 비엔나 중앙역이 가까워지고 짐을 챙겨서 이제 기차 문 앞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가 물으셨어.
"어느 문으로 내려?(알다시피 기차 문은 양쪽에 있지)"
"네?..... 열리는 문으로요"
말해놓고 나니 뭔가 죄송스러웠어.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괜히 아버지를 비웃은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사실 그렇잖아. 어느 문으로 내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잖아.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였다면 궁금할 게 결코 아니잖아.
그렇게 당신은 나이가 드셨더라고. 모르는 길도 겁 없이 찾아가곤 했던 나의 슈퍼맨은 몸과 마음 모두 분명 예전 같지 않았어. 씁쓸하기도 했고 이게 아비의 삶인가 싶기도 했어. 그래도 아직 젊은 날의 정신만은 간직하고 계신 거 같기도 해. 언젠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여행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물은 적이 있어.
"죽기 전에 남극 가야지 남극"
아버지의 대답에 나도 한 마디 거들었어.
"아버지 75세 되기 전에 제가 보내드릴게요."
약속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다시 묻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소망은 아마 여전히 그대로일 거야. 슈퍼맨은 늙어도 슈퍼맨. 예전만큼 못 날더라도 뭐 어떻게든 갈 수야 있을 거야. 가고자 하는 소망만 그대로라면. 부디 그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