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의 마지막 불꽃,
스리랑카 시기리야

사진/시기리야 오르는 바위 곳곳에 그려진 벽화. 사실적 야함이 잘 표현.

by 모래파파

4화에서 늙어버린 슈퍼맨을 회상했어. 허나 감히 슈퍼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버지는 열정 그리고 열정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를 지녔어. 늙은 슈퍼맨을 만난 2016년에서 시곗바늘을 4년 전으로 돌려봤어. 슈퍼맨의 마지막 멋진 비행을 목격한 그 시절.


“될 때까지 해야지 뭐.”

결연했어. 될 때까지 하시겠다는 60세의 아버지에게 30세의 아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어. 2011년 여름쯤 아버지는 KOICA 봉사 단원으로 해외에 나가시겠다고 했어. 정년퇴직을 1년 조금 넘게 남긴 때였지. 굳이 여쭙지 않아도 느꼈어. 오래전부터 꿈꾸셨던 일임을. 주변에서 다들 멋지다는 감탄이 이어졌어. 단 한 사람 어머니는 속앓이를 하셨지만.


처음 지원하신 곳은 탄자니아였어. 많은 지구인들에게는 그저 사자랑 코뿔소가 뛰어노는 게 전부인 곳. 새벽과 밤을 지새우며 지원서를 쓰시더니 어느새 영어 회화 책을 보고 계셨어. 이내 스와힐리어 책도 사 올 기세였어. 그야말로 신나셨던 거지. 높은 경쟁률을 뚫고 두 배 수 최종 면접까지 가셨어. 합격을 거의 확신하셨던 것 같아. 근데 떨어지셨어. 합격의 기쁨은 열 살 어린 지원자의 몫. ‘나이 때문인가’라며 아쉬워하셨지.


그때 저 말씀을 하신 거야. 될 때까지 하겠다고. 그리고 왜 퇴직을 1년쯤 앞두고 지원하셨는지도 알려주셨어. 1년 동안 될 때까지 지원해서 퇴직 전에 떠나는 걸 목표로 삼으셨던 거지. 오디션에 나서는 가수 지망생처럼 아버지는 설레고 실망하고 마음을 다잡고 그러셨어.


두 번째 지원 국가는 스리랑카였어. 합격을 하셨지. 그리고 그 해 11월 명예퇴직을 하시고 떠나셨어. 스리랑카 ‘캔디’라는 곳의 직업학교에서 전기 기술을 가르치셨지. 당시 종종 전화통화를 할 때면 아버지는 꽤 신나 보였어.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아. 실론티의 나라에서 실론티를 마시며 전해오는 여유의 농도가 퍽 진했어. 그때 아버지는 당신의 설레는 일상을 이것저것 말씀하시고 통화를 마칠 때면 늘 ‘이게 다 하나님 은혜’라고 하셨어. 불교의 국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맛보신다니.

스리랑카 콜롬보와 맞닿은 인도양. 그야말로 '현실 바다'야. 몰디브도 인도양인데 역시 바닷물은 산호초빨인가.


이듬해 그러니까 2012년 아버지를 만나러 스리랑카로 갔어. 일주일 일정의 격려 방문이었지. 사실 내가 딱히 격려할 건 없었어. 나 아니어도 잘 지내고 계셨으니까. 오히려 아버지 덕분에 스리랑카에 발을 디디는 내가 신났지. 아버지는 이미 수개월을 지낸 현지인답게 스리랑카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셨어. 캔디-시기리야-콜롬보로 이어지는 일정. 아버지는 20여 년 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녔던 그때처럼 든든한 가이드가 되셨어. 20여 년 전의 한국보다 낙후한 나라이니만큼 놓치면 안 되는 버스 편을 꼼꼼히 알아보셨던 건 물론 무질서를 관습 삼는 생활 꿀팁까지 전해주셨어. 아직 아들과 부인을 위해 여전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체를 기쁘게 여기셨던 것 같기도 해.

스리랑카 거리의 모습. 무질서끼리 조화된 분위기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시기리야였어. 스리랑카에서는 꽤 유명한 관광지야. 외국인 입장료를 현지인의 10배쯤 받았던 곳이지만 그러려니 했어. 수풀이 우거진 평원 가운데 높이 370m 바위산이 솟아 있어. 시기리야는 5세기 말 바위산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의 왕궁이야. 절벽을 따라 놓인 철제 계단을 오르면 고대 왕궁의 흔적이 나타나. 침실도 있고 화장실과 회의실도 있어. 바위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경관은 장관이야. 헌데 보자마자 누구라도 ‘도대체 왜 여기에 왕궁과 도시를 만들었지’란 의문을 갖게 돼. 지상보다 수백 미터 높이 널찍한 바위 평원 위에 도시가 있어.

S7305496.JPG 시기리야. 언뜻 보기엔 그냥 바위산인데 저 위에 도시를 세운 거야.
스리랑카사진(아이폰) 027.jpg 바위산 위에 이런 거 있어. 지금은 터만 남은 정도지만 극장도 있고 회랑도 있고 그래.

바위산 위에 왕궁을 세운 이는 카샤파 1세라는 왕이야. 그는 아버지가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란 불안감에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어. 왕이 되고 나선 동생이 쳐들어올지 몰라 늘 불안했지. 그래서 바위산 위로 올라갔고 요새와 같은 궁을 지은 거야. 당시 시기리야를 함께 오른 아버지(내 아버지)는 “왕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옥이었을까. 나는 물려줄 왕위가 없으니 네가 날 해칠 일은 없겠지”라는 섬뜩한 농담을 건네셨어. 부자의 비극이 서린 곳을 부자가 오르니 꽤 기억에 남아. 참고로 카샤파 1세 왕의 동생은, 형이 걱정했던 대로 결국 왕위를 뺏으러 쳐들어왔어. 그때 왕은 죽음을 맞이했어. 동생 칼에 죽었을 것 같지만 아니야. 몸과 마음 모두 쫓겼던 형은 결국 자결했어. 그야말로 완전 슬픈 드라마.


스리랑카에 머물 때가 아버지의 ‘슈퍼맨’ 전성기였지 싶어. 사실 아버지는 봉사활동 기간 2년을 다 못 채우고 2013년 귀국하셨어. 갑자기 아프셨는데 현지 병원에서 치료하기에는 위험했는지 한국 병원에 가야 되는 상황이었거든. 오랜 기간 가슴 한편에 키웠던 로망이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야. 아들인 나도 아쉬운 데 본인은 오죽하실까 싶어. 하지만 이미 로망을 실천으로 옮긴 것만으로도 당신은 박수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 써놓고 보니까 이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네. 지금 말해야겠다.

이전 04화슈퍼맨도 늙는다, 체코 오스트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