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I'm a gay",
영국 런던

사진/런던 어딘 가인데 기억이 안 나. 그럴 경황이 없었어.

by 모래파파

2002년. 많은 이들에게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로 기억돼.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 역시 그렇지. 월드컵 못지않게 개인적으로 강렬한 기억은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한 거였어. 처음으로 홀로 떠난 해외여행.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런던에서 여행을 시작했어.


홀로 여행을 한 지 셋째 날, 런던에서의 셋째 날이기도 한 그 날 오후였어. 초저녁이 다 됐지만 해는 중천에 떠 있던 시간. 인파로 붐비는 명소를 벗어나 한적한 공원으로 갔어. 당시 일기장을 찾아보니 '리젠트 파크라고 적혀 있어. 그냥 런던 시민들이 일상의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던 걸로 기억해.


벤치에 앉아 명하니 있다가 밀린 일기를 쓰고 있었어. 30분 정도 흘렀을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다가왔어. 180cm이 훌쩍 넘는 큰 키에 회색 안경. “아주 훌륭한 날씨”라며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지. 그러라 했지. 그는 자신을 대학교 수학과 교수라 소개했어. 예전에 해외에 나갔을 때 아무도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아 섭섭했었대. 그래서 이 공원을 지날 때 외국인이 있으면 지금처럼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고.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이니 스물한 살의 한국 청년과 50대의 영국 신사는 어느덧 축구 얘기에 빠졌어. 그는 당시 잉글랜드 감독이던 에릭손을 닮기도 했어. 결론은 ‘잉글랜드는 잉글랜드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때 우승했고 한국은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때 4강에 갔다’ 뭐 이 정도.


시간이 흘러 얼마쯤. 그가 나에게 사진을 찍지 않겠냐고 묻더라. 난 그러자고 했지. 그러더니 나보고 분수대 앞에 서라는 거야. 나는 좀 갸우뚱. 보통 여행 중에 낯선 사람과 사진을 찍을 때면 같이 찍는 게 보통이잖아. 근데 그는 그냥 나를 찍었어. 나만 찍었어. 나만...


대화는 이어졌고 그는 불쑥 나에게 ‘차 한 잔 하지 않겠냐’고 했어. 난 그러자고 했지. 현지인과 티타임이라니, 여행의 묘미인가 싶었어. 우리 둘은 공원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어. 근데 아무리 가도 고급 주택만 보이고 상점은 없어. 그렇게 10분이 지났고 난 ‘찻집은 언제쯤 나오냐?’고 물었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더라고. 드디어 도착한 곳. 그의 집 앞이었어. 그때서야 집에 들어가서 차를 마시자는 거야. 난 살짝 당황했지.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있고 ‘현지인 가정 방문’이라니 이 역시 여행의 묘미인가 싶었지. 따라 들어갔어.

런던 공원.jpg 앨범을 뒤져 찾아낸 그날 갔던 공원.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재촬영. 저 화단을 보며 벤치에 앉아 있던 나에게 영국 신사가 말을 건넸고 나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어

유럽 저층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철창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렸어. 그가 집을 소개해주는데 방이 두 개더라고. 다른 가족은 보이지 않았어. 아내를 휴가를 갔다고 하더라. 가족사진이 보였는데 아들은 캠브리지 대학에 다닌다는 말을 했지.


부엌으로 들어간 그는 밀크티를 내왔어. 그 집에는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딱히 없었고 나는 안방이 아닌 서재로 꾸며놓은 방에 있었어. 방에는 작은 침대 하나가 있었고. 그 방에는 소파가 없었으니 앉을 수 있는 곳은 침대뿐이었어.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로 그가 건넨 차를 마셨어. 그는 가방 내려놓고 편하게 앉으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내가 가방을 계속 매고 있으니 불편해 보였나 봐. 난 그냥 이게 편하다고 했어. 책장에 보니 옥편이 하나 있네. 영국인 집에 웬 옥편인가 싶어서 저거 옥편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대. 예전에 이 집에 자기 학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이 몇 달 살았었고 그 학생이 두고 간 거라고 하더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때까지 그는 줄곧 나와 대화를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어. 천천히 얘기했고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다 싶으면 친절히 쉽게 말해주곤 했어. 근데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빠르기로 말을 쏟아내는 거야. 속도도 빨랐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 단어들이 쏟아지길래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나는 섹스를 여자랑도 하고 남자랑도 해”


나도 모르게 왼손으로 바지춤을 잡았어. 오른손으로는 가방 끈을 쥐었지. 그리고 ‘난 당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눈빛으로 그를 봤어. 정확히는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라는 눈빛이었을 거야. 그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어.


“Yes, I'm a gay”


물론 양성애자랑 게이랑은 차이가 있지.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그는 그냥 그 순간 내가 이해하기 쉽게 말했던 것 같아. 나는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그렇구나. 근데 시간이 늦었으니 난 숙소로 갈게'라고 했어. 그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는 ‘나는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하지는 않으니’ 염려 말라고 했어. 나는 알겠는데 어쨌든 가겠다고 했어.


그는 배웅을 나오더니 역까지 바래다주겠대. 그리고는 지금 너의 숙소를 가려면 A역(내가 가려고 했던 역)보다는 B역으로 가는 게 낫다고 했다. 가이드북에는 A역인데... 난 괜히 성질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쩔 수없이 B역으로 따라갔어. 그는 B역으로 가면서 나의 이메일을 물어봤어.


"이메일 알려줘. 아까 찍은 사진 보내줄게."

"네 이메일을 알려줘. 그럼 내가 메일을 보낼 테니 그때 답장하면 되잖아."

"내일 뭐해? 영화 보러 가는 거 어때?"

"나 내일 아침에 네덜란드로 떠나."

"너 여행 3일째라며. 무슨 런던을 고작 3일만 봐."

"난 원래 네덜란드 가려고 여행 온 거야."


B역으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의 퍼즐이 빠르게 맞춰졌어. 왜 내 독사진을 찍었는지(반했나 봐). 자신을 왜 대학교 교수라 소개했으며 아들을 캠브리지 대학에 다닌다고 소개했는지(자신이 인텔리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 같아. 나 안심하라고) 왜 그 방에는 옥편이 있었는지(그 중국인 유학생이 파트너였던 거야).


B역으로 가는 게 낫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어.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작은 역이었어. 그는 헤어지면서 말했어.


“우리가 다른 곳 다른 시간에 만났다면 더 좋은 인연이 됐겠지만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아쉬워.”

“그래, 나도 아쉬워.”


18년 전 난 진정한 영국 신사를 만난 걸까. 그는 멀리서 온 이방인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어. 상냥하게 자기 나라를 소개했으며 다정하게 나의 나라를 궁금해했어. 선뜻 차 한 잔을 대접했으며 친절히 길을 알려줬어.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했지. 난 그래서 '영국 신사' 정말 인정해.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어. 그때 찍어놓은 내 사진 보며 혹시 추억에 잠기진 않을는지. 난 그의 사진은 없지만 'Yes, I'm a gay'라고 말할 때 그의 눈빛과 표정은 사진을 찰칵 찍어놓은 듯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어.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는데 나처럼 하면 안 된대. ‘차 한 잔 하러 갈래?’란 말에 따라나서면 안 되고 집에까지 들어가는 건 더더욱 안 되고. 그러고 보면 그 사람은 내가 그린 라이트를 보냈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래 놓고서 거절했으니 서운했으려나. 어쨌든 우리 어릴 때 배운 것처럼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 주며 어디 가자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고 해도.


2002년 런던을 갔을 때 찾았던 마담 투소 박물관에 있던 에릭슨 당시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 감독. 내가 만난 영국 신사와 매우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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