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더 이상 독서(讀書)의 계절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책은 읽는(讀) 대상에서 듣는(聽) 대상으로 변했다. 처음 문서가 발명된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책 소비형태는 지역이나 시대별로 뚜렷한 차이를 갖지 않았다. 글자가 인쇄된 종이를 소리 내어 읽거나, 묵독을 하거나 대독을 하는 방식 말고는 책을 소비할 방법이 없었다. 이북(ebook)이 나오기 전까지는. 종이를 매개로 한 책이 아닌 디지털을 매개로 한 이북이 나오면서 기존과 다른 책 경험이 가능해졌다. 읽는 책에서 듣는 책으로 발상의 전환이다.
이북은 종이책을 컴퓨터나 핸드폰 혹은 전용 장비에서 디지털화되어 볼 수 있게 한 전자책이다. 종이책으로 2020년 11월이 가기 전에 읽을 책 3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일은 가능하다. 욕심 좀 내면 30권도 해볼 만하다. 그런데 전자책은 메모리가 허용하는 한 100권이든 1000권이든 - 다 읽는다는 것과는 별개로 - 들고 다닐 수 있다. 또 전자책은 종이책이 갖지 못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음성지원 기능이다. 책을 음악처럼 들을 수 있다. 비 오는 날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듣듯이 쇼팽의 친구 리스트가 쓴 책 <내 친구 쇼팽>도 들을 수 있다. TTS(Text to Speech)라는 컴퓨터가 글자를 읽어주는 기술 덕분이다. 초기에 '도둑 잡아라'라는 음성을 도둑이 들었다면 피식 웃었겠지만 지금은 긴장하고 달아날 만큼 자연스럽게 들린다.
얼마 전 지인에게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서로의 취미 정도는 알고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기반한 질문이었다. 다행히 지인은 요즘도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 바빠서 책 볼 시간이 없다는 대답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당연한 순서로 이어서 되돌아온 같은 질문에, 나는 요즘 책을 '듣고'있다고 답했다. 시간도 절약되고 편리한 면이 있어서 책 듣기를 주로 하고 있다고 답했다.
나에게 읽는 책에서 듣는 책으로의 변화는 뚜벅이에서 운전자로의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변혁이었다. 시간과 집중력의 소비가 만만치 않은 읽기에서 멀티가 허용되는 듣기로 전환은 같은 시간을 보다 효율적이고 밀도 있게 쓰고 있다는, 실제적 효과와는 별개로 심리적 만족을 준다.
읽기와 듣기 사이에서 맹렬한 갈등은 마음과 신체의 대리전이다. 종이 물성에 대한 애착, 손 맛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감성, 종이책 고유의 향기는 대신할 게 없다는 '읽기' 연합군과 책 내용도 들으면서 운전이나 운동도 할 수 있도록, 다른 신체의 자유를 허락하는 '듣기' 연합군 사이에 공방이 진행 중이다.
중요한 건 어느 편이 이기든 패자가 없는 행복한 전투다. 읽거나 듣거나 최소한 책을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승자다.
지금도 마음은 읽으라 하고 몸은 들으라는 기특한 내면의 다툼이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