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귀신과 드로잉
저마다 반복되는 꿈의 소재나 양상이 있다. 아주 집요한 건 아니지만 나도 익숙한 꿈들이 몇 가지 있다. 한동안은 온갖 음식들이 나타나다 사라졌고, 한번씩 수학여행을 떠나고, 동물들이 나를 스치고, 이따금 집 안에 너무 많은 손님들이 찾아든다. 그리고 종종 엄마가 있다. 옆 좌석에, 베란다에, 돌아오는 길에.
간밤에는 오랜만에 귀신이 나왔다. 꿈속의 귀신들은 대게 뒤틀린 에너지들로 뒤덮여 있다. 죽은 채 살아있는 것들의 세계에 나타나니 그 자체로 꿈의 세계는 위협적이다. 흠뻑 두들겨 맞고 병실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뜬다.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꿈이다. 귀신들의 존재는 내 정신과 정서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그런 감각적 경험은 결코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지만, 남아있는 잔재들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여서 머리를 털며 침대맡의 꿈노트를 펼쳤다.
무속인이며 무형문화재 원로였던 스승은 서릿발 같은 무대를 펼치고는 어느새 악령이 되어 테이블 위에, 커튼 자락에 또아리튼 독뱀처럼 도사렸다. 그 무대를 이은 제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제자-가 허공에 높이 도약하여 전동드릴처럼 회전할 때 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감격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공포스러웠다. 그건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경외시하는 능력이었지만, 악령은 꿈 전체를 삼키려는 것처럼 자꾸 균열을 만들어냈다. 나는 온몸으로 커튼을 뜯어내어, 커튼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커튼 끝에 달린 레일 바퀴와 쇠고리들이 콘크리트에 부딪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세차게 내리쳤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야만, 다 떨어져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옆에 놓여있는 티비에서는 커튼자락을 따라 몸부림치는 귀신의 날카로운 비명이 동시 재생되고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꿈까지 선명히 기억은 났지만, 이쯤 쓰는 것만으로 힘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완전히 죽어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자꾸 저렇게 원귀처럼 좀비처럼 고약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걸까? 그런 질문을 하나 던져놓은 채 아침으로 만두 다섯 개를 쪄먹고, 딸기 여섯 일곱 개쯤을 씻어 먹고 집을 나왔다.
하루 동안의 메모 (타인의 내면 작업이니 알아서 패스해 주시길 )
- 귀신 : 무엇이 왜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가. 무엇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애도하지 못하고, 뭉개며 사는 가. 제대로 죽지 못해서, 사라지지 못해서, 이런 식으로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는 원귀야말로 더 괴로운 존재는 아닌가...(짠해지고)
- 예술가 : 스승과 제자. 그-그들-의 무대는 올림픽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였고, 너무 짧은 준비 기간을 오로지 본인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채워냈다. 그렇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와 인간성을 뛰어넘는 예술성(-러시아 약물 논란 피겨선수의 스핀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은 한편으론, 비대해지기만 하는 내 욕망을 비추는가 싶기도. 전 세계의 관중을 매료시켜야 하는 단 한 명의 예술가라니, 그 셋팅이 이미 과하다.
-커튼 : 문득 왜 그토록 하얗고 커다란 커튼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창안으로 넘어오려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커튼에 갇힌 것만 같다. 창밖으로도, 창안으로도 갈 수 없는 존재. 아침마다 나는 침대옆의 흰 커튼을 걷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두꺼운 커튼을 젖히고 얇은 샤 커튼이 잔잔하게 팔락거리고 있는 오전의 풍경이 좋다. 더 이상 나를 이대로 두면 안된다는 경고처럼, 그 아름다운 풍경에 깃들어 보인걸까?
18:40
그렇다면 스승은 스스로 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질투와 집착 때문에 원귀가 된 걸까, 아니면 제자의 그릇된 욕망과 행보로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걸까. 아니다. 어쨌든 확실히 느껴지는 건 니가 아니라 내가, 그 무대에 서야 한다. 그 스포트라이트를 내가 받아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에 가까웠다. 좀 더 그 경기장의, 전 세계의 관중들을 사로잡기 위해 '귀신들린 능력'을 갈구했던 스스로가 불러낸 것이 그 제자-실은 귀신에 가까운, 인외의 존재-였고, 곧 자기 존재의 파멸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제자의 감정 없고, 동요 없는 눈동자가 떠오른다.
19:30
커튼빨래하고 싶어졌다.
2days 15:49
그나저나 커튼 패대기라니, 어딘가 격렬하고도 거추장스러운 퇴마가 아닐 수 없다. 얼핏 그 장면만 떠올리면 집안일에 미쳐버린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이대로 잠식될 수는 없어서, 극한의 두려움에 치를 떨었던 감각이 선하다. 그토록 치가 떨리는 나의 어떤 부분.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귀신의 기운에 휩싸여 있던 이전의 꿈들에 비해서는 조금 달라진 양상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커튼 빨래하고 싶다. 모른체했던 얼룩들을.
16:28
그런 식으로 미루고 있는, 크고 작은 것들. 얼추 덮어놓은 가짜 무덤들 위에서 세우고자 했던 춤과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