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날 이후, 평범한 밤은 없었다

by 카르페디엠

‘전해졌을 거예요.’

그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말하고 싶었다.
그게 나라고, 고래책방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대 위의 시우는 너무 따뜻했고, 너무 빛났다.
그 앞에서 자신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래서 결국… 숨었다.




그날 이후, 일상은 겉보기엔 그대로였다.
회사에 출근하고, 회의를 하고, 원고를 검토하고,
마감 기한에 쫓기며 하루를 정리하는 반복된 시간들.


하지만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 가장 먼저 느꼈다.


시우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무대 조명이 꺼지던 순간부터,
그의 눈빛, 말투, 그가 말한 “고래책방”이라는 이름이…
자꾸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분명 몰랐다.
눈앞의 그녀가 바로 그 댓글을 남기던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은하는 이상했다.
그가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놓이게 하는 동시에, 아프게 만들었다.




며칠 후, 평일 저녁.

은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습관처럼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 알림창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라이브] 하늘담은 목소리 – 밤에게 전하는 노래


은하는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클릭했다.
화면이 열리자, 익숙한 배경.
피아노 앞에 앉은 시우가 보였다.


“오늘은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진지해 보였다.

“며칠 전, 한 행사를 다녀왔어요.
댓글로만 마주하던 어떤 닉네임을 무대 위에서 말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그 순간이 많이 떨렸어요.”


은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우의 손은 피아노 위에 얹혀 있었지만 아직 건반은 눌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말을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진 것 같았거든요.”


순간, 은하의 가슴이 뭉클하게 저려왔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이, 그녀를 또 흔들었다.

“그 이름이… 따뜻했어요.
‘고래책방’.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글을 쓰는 사람일까…
그냥 그런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은하는 눈을 감았다.
숨이 깊어졌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속 낡은 문장을 조용히 깨뜨리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은하는 처음으로 오랫동안 묵혀둔 글을 열었다.
출판사 일 외에, 자신이 직접 쓰던 오래된 짧은 이야기 파일들.
문장들이 어딘가 촌스럽고 미완성이었지만, 그 안에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단어가 흐르고, 문장이 이어지고, 마음이 녹았다.
그는 모른다.
지금 이 글이…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걸.




그날 이후, 밤은 더 이상 이전 같지 않았다.
일상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마음은 조용하지 않았다.


은하는 ‘고래책방’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줄의 댓글을 남겼다.

“당신의 말 한 줄이,
다시 나를 쓰게 했어요.”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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