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의지박약의 협곡, 무너지는 시작
오늘 하오빛판타지와 연결된 팟캐스트
오늘 하오빛판타지와 연결된 브런치북
하오빛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희미한 잿빛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고, 콧속으로는 차가운 흙먼지 냄새가 스며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를 감싼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협곡의 벽은 어딘가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듯한, 깨진 콘크리트와 메마른 흙덩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늘 아래, 바닥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물체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희미하지만, 그 파편들에서 흘러나오는 냉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지?”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공기는 그 소리마저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도 밀린 방송 원고와 새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 정말 시작하기 싫다. 또 미루게 될 거야.’ 그런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뒤틀리더니 이곳으로 빨려 들어온 것이다.
그때였다. 협곡 저편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마치 무너지는 건물 같은 소리였다. 하오빛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협곡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기둥 하나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기둥은 어딘가 불완전하고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억지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려는 듯했다.
기둥을 보는 순간, 하오빛은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저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저 기둥이 무너지면,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의지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삶의 동력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 걸음 내딛자, 발밑에서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부서졌다. 그는 재빨리 발을 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깨진 파편들.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다. 차가운 감각과 함께 알 수 없는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밤새워 준비했지만 끝내 제출하지 못한 기획서. 시작도 못 해보고 삭제된 창업 아이템. 끝까지 쓰지 못하고 포기한 소설의 마지막 장.
“이건… 사람들의 포기된 의지인가.”
하오빛은 깨달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포기한 꿈, 이루지 못한 다짐, 좌절된 노력들이 뭉쳐 형성된 공간이었다. 협곡의 벽면에는 거대한 금이 가 있었고, 금 사이에서는 칙칙한 회색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끈적한 절망처럼 느껴졌다.
그때, 거대한 기둥에서 다시금 ‘크르르릉’ 하는 굉음이 울렸다. 기둥의 균열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동시에 바닥에 흩어져 있던 파편들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지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날카로운 파편 조각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치 불안정한 거미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좌절의 파편’이었다.
“젠장!”
하오빛은 몸을 피하려 했지만, 파편들은 생각보다 빨랐다. 날카로운 조각 하나가 그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그의 머릿속으로 ‘어차피 안 될 거야’, ‘포기하는 게 편해’ 같은 부정적인 속삭임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의지를 갉아먹는 공격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파편들을 피하며 기둥 쪽으로 나아갔다.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몰려드는 ‘좌절의 파편’들이 그의 길을 막았다. 하나를 피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났다. 그들이 내뱉는 속삭임은 점점 더 강렬해져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항상 그랬잖아.’
그 순간, 하오빛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늘 그랬을까?’
그는 라디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마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왔다. 그들의 삶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내면에는 이렇게나 거대한 의지박약이 존재했고, 지금 그것이 현실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바로잡지 못하면, 그가 현실에서 전하려 했던 모든 위로와 응원마저 무의미해질 터였다. 그는 ‘하오빛’으로서, 자신의 필명이 상징하는 빛을 지켜야만 했다.
이를 악물자, 그의 가슴속에서 작은 빛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수많은 이들에게 전했던 ‘끈기’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빛이 그의 손바닥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작은 나침반 모양의 결정체였다. 바늘은 맹렬하게 흔들렸지만,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희미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나는… 포기하지 않아.”
하오빛은 ‘끈기의 나침반’을 꽉 쥐었다. 나침반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빛이 ‘좌절의 파편’들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틈을 타 기둥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기둥은 이제 마지막 숨을 내쉬는 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균열은 손가락 두께에서 팔뚝만 한 크기로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어둠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기둥의 꼭대기에서 거대한 파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하오빛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같은 조각. 그는 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았다. ‘이대로 끝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의 손에 쥐여 있던 ‘끈기의 나침반’이 갑자기 맹렬한 빛을 뿜어냈다. 나침반의 빛은 마치 살아있는 의지처럼 솟아올라, 떨어지는 파편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은 산산이 부서지며 먼지로 흩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거대한 기둥과 그 안의 깊은 균열만이 남아 있었다. ‘끈기의 나침반’이 흔들리며 미묘한 떨림을 보냈다. 나침반의 바늘은 이제 기둥의 가장 깊숙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오빛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나침반을 든 손을 기둥의 가장 큰 균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손이 닿자, 차가웠던 기둥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침반의 빛이 기둥의 균열 속으로 스며들어가자,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살점처럼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으으으…’. 기둥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안도하는 듯한 미세한 진동으로 바뀌었다. 균열이 완전히 닫히자, 기둥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굳건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무너질 것 같았던 위압감 대신, 묵묵히 서 있는 거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동시에, ‘좌절의 파편’들은 힘을 잃고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칙칙했던 ‘절망의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며 희미한 새벽빛이 협곡의 저편에서부터 스며들어왔다. 공기는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하오빛은 심호흡을 했다. 온몸이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선명했다. 그는 ‘끈기의 나침반’을 다시금 손 안에서 확인했다. 이제 나침반의 바늘은 안정적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그의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나침반은 외부의 길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길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듯한 감각. 눈을 깜빡이자, 그는 익숙한 천장 아래,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에는 마치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던 듯한 아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그가 방금 겪었던 모험과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오빛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밀린 일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했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활력이 넘쳤다. 그는 곧장 책상에 앉아 며칠째 미뤄왔던 방송 원고를 펼쳤다. 막막했던 머릿속에는 놀랍게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샘물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데아의 저편에서의 첫 번째 모험. 그것은 단지 꿈이 아니었다. '형용사의 지배자'로서 하오빛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