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PD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
첫 회사에 합격한 것은 첫 면접을 보고도 6개월 뒤 즈음의 일이다.
한 작은 방송사의 뉴미디어팀 SNS PD로 시작을 하게 되었다. 계약 파견직에 월급은 당시 최저 임금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입사 일주일 차, 환영 회식 때의 일이다.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안 됐을 때였다. 동료 A와 B는 사무실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동료 A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왜 그러지? 하고 옆을 보는
순간 동료 A가 동료 B에게 몸을 날렸다. 테이블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평소에 동료 A가 본인 자리(책상)에 불만이 있었는데, 동료 B가 본인보다 어리지만 더 일찍 입사했단 이유로 좋은 자리에 앉아있는 게, 그리고 그걸 동료 B가 당연하게 생각한 게 열이 받는다는 이유였다.
금방 이성이 돌아올 정도의 가벼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했는지 두 사람은 계속해서 치킨집 바닥을 계속 뒹굴었다.
‘자리가 더 좋다는 이유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려고 내가 그렇게 오래 힘들었다고?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거 ’ 탈주‘ 신호인가?‘ 그렇지만 일주일 만에 나가기엔 취업준비 기간은 길었다. 게다가 나는 정말 막다른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이별을 못한다는 안타까운 판단력의 소유자였기에 (그만두는 법을 몰라 계약이 끝날 때까지 2년을 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실망스러운 사회에 대한 반항은 ‘수동적으로 받는 만큼만 일하기’였다.
요즘은 ‘뉴미디어’라는 말이 그다지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이미 너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뉴’의 규정이 애매하기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너네가 뉴미디어팀이면 나는 올드미디어냐’는 한 방송국 분의 항변이 지금 보니 꽤 일리가 있다.)
당시 언론 방송의 뉴미디어 지형 배경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2010년대 초반 페이스북의 보편화 이후로 많은 담론들이 페이스북에서 이야기되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언론이 있길 마련이니 당시 방송사들은 자신들의 인프라를 활용하여 뉴미디어 상에서도 우위를 점하고자 했고, 1인 크리에이터 수익이 방송국의 것을 뛰어넘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까진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뉴미디어는 기존 언론방송인들에게 ‘진짜’ 미디어가 아니고, 언론고시를 보지 않은 대학생 혹은 저퀄리티 인력이 하는 매체였다. (참고로 방송가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가 많다.) 명함에 PD라고는 찍혀있는데 단 한 번도 PD라고 불린 적이 없었고, (심지어 방송용 영상을 몇 번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에서 그런 취급이니 나 조차도 나를 PD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뉴미디어 생태계에서 당시 SBS의 뉴미디어 사업은 꽤 독보적이었다. <비디오머그>, <스브스뉴스>, <모비딕> 등 ‘방송국이 만드는 모바일 전용 콘텐츠’는 꽤 젊고 과감했다. 그들이 그렇게 선두를 달리고 있다 보니 내부에서도 ‘우리도 문명특급 같은 거’에 대한 압박이 생겨났다.
당연히 나와 내 동료들은 부정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SBS는 젊은 인력의 의견에 굉장히 개방적으로 보였다. (뉴미디어팀 직원들의 끊임없는 설득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우리에게 문명특급의 수준을 원하는 윗분들만큼 이해 안 되던 것은 재재씨였다. 적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일하기를 실천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전문 엠씨처럼 고군분투 중이었다. 나는 이 뉴미디어 직군이 취급받고 있는 생태계를 알고 있으니 그녀가 왜 저리 열심인지, 열정적인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왜 받는 만큼만 하지 않아서 우리를 비교되게끔 하는 걸까 왜?’
그런데 그 해답은, 수년 뒤 지금 그녀가 이룬 것들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냉소적으로 보는 것 만큼 한심한 게 없단 것도 깨달았다.
도덕성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2년여간 약 700개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1인이 기획과 제작을 모두 책임지다 보니 실제 반응과 나의 기획의도가 멀어지기도 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한 번은 인터뷰를 위해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고 신청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데에만 몰두해 있다 보니 얄팍한 학연을 먼저 내세운 적도 있었다. 상대는 정중히 거절했고 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공익이란 명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쉽게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인지했다.
재능의 영역이라 생각했고 잘할 자신이 없었다.
PD는 결국에 근본적으로 회사원이기에 점점 내가 신경 쓰는 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닌 회사가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회사의 컨펌을 받는 것이 목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팀에 마케터가 합류하면서 생산 후 되돌아보지 않았던 결과물들을 구체적인 지표를 통해 해석하고 회사의 방향성과 맞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여러 가지 제안을 주었다.
그러자 콘텐츠를 만든다는 일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회사의 방향성을 그대로 따라가자니 재미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설득할 만큼 내가 재미를 뽑아낼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재능의 영역처럼 보였다.
그러다 계약 종료가 되었고, 나는 직무를 바꿔 구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개월 뒤, 언론사 계열사로 1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첫 정규직 직장을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