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일은 '기업교육 강사'였기에 피드백을 받는 건 일상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교육생들의 피드백이 바로 나온다. 교육과 강사 만족도에서부터 어떤 게 좋았고, 어떤 게 아쉬웠는지 등등. 피드백을 통해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 가끔씩은 무성의하거나 가혹하게 느껴지는 피드백을 듣게 될 때도 있다.
지금이야 만족도와 평가를 이메일로 받아보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직접 대면해서 피드백을 받곤 했다. 그렇게 피드백을 받는 순간은 늘 긴장된다. 교육 평가가 안 좋거나, 감정을 상하는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운 빠지는 피드백은 아예 피드백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경우다. 바로, 말도 없이 잘렸을 때.
배려가 담긴 피드백이라도 날카로운 지적을 받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피드백이라는 게 그렇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행위이기에 감정적인 손상과 아픔이 동반된다. 아무리 '나' 아닌 '내가 한 무엇'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을 고치려 해도 손상된 마음이 쉽게 돌려지지 않는다.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결코 쉽지 않은 게 바로 피드백이다.
그럼에도 피드백은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누군가의 피드백을 통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에 꼭 필요한 피드백을 받을 때,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받은 피드백 중 가장 기분 나빴던 것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외모 지적이었다. 내가 너무 외모를 가꾸지 않고,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강사로서 품위를 지켜달라는 게 요지였다. 당시 나는 겨울 내내 똑같은 잠바(검정 파카)를 입고, 모임에 참여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강사 피드백의 자리가 잡혔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장도 좀 하고, 의상을 신경 써서 입으라는 것이었다. 맙소사! 교육 내용도 아닌 외모에 대한 피드백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민망하고 부끄러웠는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두 번째로 기분 나빴던 피드백은 "인풋은 많은데, 아웃풋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가까운 언니가 알음알이로 공부하러 다니고 있는 사주명리학 선생님의 이야기다. 학자 사주에 가까워서 뭔가 집어넣는 건 많은데, 빼내는 게 힘들다는 말이었다. 하나를 알아도 열 개를 유창하게 빼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서너 개를 집어넣어도 한 개를 간신히 빼낼까 말까 한다는 것이다.
강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나로서는 치명적인 피드백이었다. 가뜩이나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 말을 듣고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제대로 된 길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답도 나오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힘이 빠졌다.
세 번째는 피드백이라기보다는 듣기 싫었던 말. 바로 '아줌마'라는 호칭이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척 봐도 아가씨가 아니니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게 뭐 그렇게 기분 나쁜 말인가 싶지만, 아직도 가끔씩은 나를 지칭하는 '아줌마'라는 호칭에 마음이 상한다.
나를 모르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막상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여기요. 저기요.' 정도다. 길 가다 만난 사람일 뿐인데, 아가씨도 이상하고, 선생님이나 사장님도 어색할 터다. 남자라면 '아저씨'가 일반적일 테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자에게 어울리는 호칭이라곤 '아줌마'가 적당한 듯싶다. 그런데 그 호칭이 거슬릴 때가 있다. 뭔가 '어이, 아줌마' '어이, 거기'라는 식으로 내리까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첫째, 외모 지적 피드백은 15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때의 피드백이 나한테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너무 외모에만 신경 쓰는 것도 문제겠지만, 상황에 맞춘 의상과 이미지메이킹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피드백을 계기로, '복장'과 '보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격식과 분위기에 맞는 화장과 차림이 중요하다. 아무리 내가 괜찮아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외모를 가꾸고, 분위기에 걸맞은 옷을 입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이고,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자기 관리이기도 했다. 외모 지적을 받은 후 깨달은 것은 옷을 잘 갖추어 입는 것에서부터 전문가로서 평가받는다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게 중요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력과 내공을 갖추어야겠다는 각오.
둘째, 아웃풋이 어렵다는 피드백. 사주에 결정되어 있는 성격적인 단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니, 그것에 반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기운이 빠졌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해도 별로 성과를 못 내며, 말주변이 없어서 강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선고를 받는 것 같았다. 피드백이 미친 영향은 너무나 강력했다. 강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으니까. 나는 사주 자체가 뭔가를 생산하거나 말로 하는 일이 능하지 않다는데 어쩌겠나 싶었다. 무슨 지워지지 않는 도장이라도 찍힌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고민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엔 다시 교육 일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는 다른 어떤 일 보다 나에게 잘 맞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주가 그렇다면 더 많이 채우고, 더 많이 공부하면 어떨까. 하나를 알고 섣부르게 열 개를 떠벌리는 것보다 서너 개를 공부해서 한 개라도 제대로 끄집어낼 수 있으면 좋은 게 아닐까.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러자 한동안 지속됐던 매너리즘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남의 인생에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걸 배웠다. 자신의 인생은 누군가의 판단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스스로 결정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도. 내가 하는 일에서 남보다 꼭 앞서고 일등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것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내가 찾은 답이었다.
셋째, '어이 아줌마'라고 들리는 말. 이건 글쎄 피드백은 아니지만, 때때로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다 보니, 늘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할아버지 한 분이 친근감의 표시인지, "어이, 아줌마"하며 나를 반기곤 하셨다. 하필, 내가 싫어하는 말로. 산에 매일 다니다 보니, 인사를 나누는 분들이 점점 많아졌지만, 유난히 그 할아버지를 마주치는 게 싫었던 이유를 알았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건 그분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그냥 매일 보니까 좋아서 인사하고 싶은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아줌마'라는 호칭을 쓰며 아는 척을 하는 할아버지가 얄궂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아줌마라는 호칭 말고, 괜찮은 다른 말 없을까.
학생에서 처음으로 아가씨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하게 어색했던 적이 있었다. 아가씨라는 말을 듣다가 처음으로 아줌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불편함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할머니'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그때쯤 되면 아줌마라고 불러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모임에서 서로의 성장을 위해 응원과 지지와 함께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다. 존중과 배려로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려고 노력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피드백을 받을 때, 피드백은 빛을 발휘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피드백을 통해 꼭 필요한 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피드백을 나누다가 그동안 내가 받은 피드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는 일이 기업교육 강사였기에 수많은 피드백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가장 기분 나빴던 피드백들은 일로 받은 피드백이 아니라 뜻하지 않았던 피드백들이었다는 게 의외였고, 재밌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피드백들을 받으며 살 것이고, 수많은 피드백을 주면서 살게 될 터다. 삶이란 상호작용이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이기에. 기분 나빴던 피드백을 받았을 때의 마음을 돌아보며 생각해본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통해 도움을 주었고, 때론 아픔을 주었을까. 피드백을 주게 될 때 좀 더 배려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