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2학년 봄, 학교 복도 끝 게시판에 붙은 작은 공지가 너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대한적십자 청소년 단원 – RCY 1기 모집.”
새로운 것,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일. 그 말에 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건 마치, 처음 만나는 세상을 네 손으로 만들어보라는 초대장 같았다. 지원하던 날, 담당 선생님은 네가 기타치는 모습을 유독 좋아하시던 도덕 선생님 이셨다. 영서 너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씀하셨다.
“채영서, 네가 1기 단장을 해보는 게 어때? 우선 전국 RCY 협회에 가서 우리 학교의 단장이 되었음을 신고 하고, 대한적십자사 교육을 대표로 가서 받고 오도록 해. 그동안 단원들을 모집하고 있을테니..”
순간 네가 느낀 건 부담이 아니라 묘한 설렘이었다. 네가 중심에 서게 된다는 사실보다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이끌고 어딘가로 함께 간다는 그 감각이 좋았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방과 후마다 RCY실 불은 가장 늦게 꺼졌다. 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외부활동도 많이 나가고,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이 전부였던 네게 또 다른 넓은 세상이 펼쳐졌다. 책임감이 있었고, 자신감이 생겼고, 자존감이 자라났다.
너는 새로 들어온 단원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고, 각자의 특기와 특징을 기억해 나갔다.
‘수민이는 행동이 빠르고, 현주는 글씨가 예쁘고…’
너에게 그건 ‘사람을 기억하는 예술’ 같았다. 첫 봉사활동은 장애인 생활시설이었다.
세제를 물에 풀고, 커다란 담요를 함께 밟으며 빨았다. 발끝이 얼얼해질 만큼 차가운 물에서도 너희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비누 거품 사이로 햇살이 반짝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보육원 봉사 날에는 밥을 지었다. 아이들은 너를 “언니!” 하고 불렀고, 너는 국자를 쥔 채 웃으며 “많이 먹어!” 하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작은 식당 안을 꽉 채웠고, 그날의 냄새 — 김이 오르는 밥냄새, 아이들의 손 냄새, 그리고 네 땀 냄새 —
그건 아직도 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RCY 단원복 주머니에는 언제나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단장, 오늘 수고 많았어.”, “기타 소리 너무 좋아요.” , “영서야, 너 덕분에 우리 분위기가 달라졌어.”
그 쪽지들은 하트 모양으로 접혀 있었고, 어떤 날은 사탕이 하나 함께 들어 있기도 했다.
편지 속의 네 이름은 항상 ‘단장’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수많은 편지 속에는 ‘친구’라는 단어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교실로 찾아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엔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는데..
“너랑 특별히 친해지고 싶은데 넌 어떠니?”
그 이후로 그 2학년 선배는 네게 자주 선물을 보내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거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너는 그 선배하고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바빴다. 3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우리 그만 헤어지자. 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거 같아."
그 말을 듣던 순간, 너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너는 모두와 친했기 때문에. 한 사람과 특별히 친해지지 못하는 그것이 그게 왜 나쁜 건지, 그때의 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성의 선배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말의 의도 역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매일 같이 언제든 학교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이인데.. 헤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지? 아는 척이나 인사도
하지 말라는 건가?'
마치 해 보지도 않은 연애를 하다 헤어지는 것처럼 네게 먼저 다가와 먼저 이별을 말하던 그 선배의 모습은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아있었다.
그날 밤, 노트를 펼쳐놓고 네가 쓴 문장이 있었다. “나는 그냥, 모두가 나를 싫어하지 않고,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왜 어려운 거지? ” 그 문장은 단정하지만, 그 안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너는 그날 이후로 ‘좋아한다’와 ‘가까이한다’는 게 다르다는 걸 배웠다. 속마음을 쉽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그들이 멀어지는 이유가 아니었을지... 조금은 신비하게 감추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일까.. 끊임없이 고민했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이면 여전히 네가 제일 먼저 봉사 일지를 챙기고, 가장 늦게 교실을 나섰다.
네가 맡은 일에는 언제나 진심이 있었고, 그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엔 충분했었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던 날,
너는 단원들과 함께 마을 어르신들에게 연탄을 나르러 갔다. 청바지에 RCY 점퍼를 걸치고, 검은 연탄 가루가 손가락에 묻은 채로, 너는 하얗게 웃었다. 손은 시렸지만 마음은 뜨거웠던 그 겨울.
그날 밤, 돌아와서 너는 거울 앞에 섰다. 붉은 완장이 팔에 감겨 있었다. 낡은 천 조각이지만, 그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훈장처럼 보였다. 그때의 너는 그 완장이 언젠가 너를 세상의 중심으로 이끌었다가, 또 다시 가장 외로운 자리로 데려다 놓을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살다보니, 작은 네가 어느새... 리더가 어떤 자리인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