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7
봄 햇살이 교실 유리창 위로 흘러들던 1학년 어느날, 네가 앉아 있던 창가 자리에는 연지가 보였다.
종이학을 잘 접던 아이, 가수 이상은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트 귀퉁이에 가사를 적던 아이.
연지는 조용했지만 눈빛이 또렷했고, 너는 그런 연지의 말투와 얌전한 미소가 좋았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서로 바꿔 먹고, “이건 네가 한 거야? 엄마가 아니고?” 하며 깔깔대던 기억.
그 시절의 도시락은 언제나 뜨겁고, 김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너희는 그 맛있고 기분좋은 공간에서 ‘베스트 프렌드’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그러나 2학년이 되던 봄, 반 편성이 바뀌며 연지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 날 아침, 명단을 확인하던 순간의 공기가 넌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같은 반이면 좋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데 그 이름이 명단에 없을 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가방을 열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마음을 쿡 찔렀다.
새로운 반에는 너를 포함해 57명의 아이가 있었다. 네 번호는 56번. 복도 끝까지 늘어선 교실을 꽉 채운 책상들, 분필 가루가 흩날리는 창가, 그리고 아직은 서로 어색한 웃음들. 그 속에서 너는 반 아이들 모두와 친해지면 어떨까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누구와만 친하다는 특정 친구와의 단짝이 아닌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게 네 방식의 평등이었고, 너만의 새로운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네가 한 짓이 있다. 알록달록 예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꺼내 수십 가지의 질문지를 손으로 썼다. ‘좋아하는 색은 뭐야?’, ‘가장 싫은 일은 무엇일까?’, '나를 처음 본 첫인상은 어땠어?’ , '어떤 연예인을 좋아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 '가고 싶은 나라는? ' 그 글씨들이 빗살무늬처럼 봉투 안을 가득 메웠다.
다음 날, 너는 그 봉투가 들어있는 노트를 한 명에게 건넸다. 책상 위에 놓으며 “시간 되면 읽어보고 써줘.”
그건 네가 만든 앙케이트, 아니, 마음을 여는 열쇠였다.
며칠 뒤, 너의 노트 속은 반 아이들의 답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참여했고, 3권의 노트가 한묶음이 되었다. 이 노트는 아직도 네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 열어보면 그 시절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이 잘 연결되지 않지만, 분명 그것은 너의 역사이고, 살아있는 추억이었다. 푸른 볼펜, 빨간 펜, 지우개 가루가 묻은 낙서들까지 고대로 남아있다.
“넌 웃을 때 미소가 환하고 예쁜거 같아.”
“나는 네가 좀 어려워. 어렵지만, 같은 반이 되었으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너 소풍에서 노래하는 거 봤어. 잘 하더라."
“영서야, 과학시간엔 왜 그렇게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어?”
각자의 필체로 쏟아진 말들 속에서 너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모든 게 즐거웠지만, 어딘가 이상하게도 가슴 한 켠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56명 전부에게서 앙케이트 답이 돌아왔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어쩌면 네 바람대로 단짝이 되진 않았다. 화장실 가는 쉬는 시간만 되어도 아이들은 둘씩 손을 잡고 다녔다. “같이 가자~” 하는 목소리들이 교실 문을 쾅쾅 울리며 떠났지만, 그 사이에서 너와 화장실을 같이 가는 아이는 없었다.
그때는 그게 이상하진 않았다. 화장실을 같이 간다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고, 같은 칸에 들어가 서로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니까. 누구에게도 화장실을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니, 자연히 너는 반에 단짝이 생기지 않았다.
다른 반이 된 연지는 학교보다는 방과후에 따로 만나는 일이 많아서 굳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만나진 않았다. ‘나는 모두랑 똑같이 친하니까 괜찮아.’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한편으로 커져가는 외로움은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매일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눴다. “오늘은 내 반찬 먹어볼래?” 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 뒤에는 ‘혼자는 아니라는 안도감’도 숨어 있었다. 가끔 복도를 지나치며 웃으며 만나는 연지에게 손을 흔들고 나면 그 모습만 봐도 하루가 괜찮았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네 자리는 늘 중간 어딘가,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었다. 누군가의 옆자리가 되길 원했지만, 누구의 편도 되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 — 그게 너를 특별하게도, 외롭게도 만들었다.
어느 날 밤, 너는 앙케이트 답을 다시 꺼내 읽었다. 노트에 붙은 종이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은 채 책등이 부풀어 있었다. 그 사이로 볼펜 잉크가 번지고, 몇몇 글씨는 조금 흐려져 있었다. 너는 그걸 손끝으로 따라가며 속삭였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좋아해…”
그때의 너는 몰랐지. 그 앙케이트가 훗날 너를 ‘모두에게 닿되,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걸. 그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의 시작이었고, 외로움을 견디는 법의 시작이기도 했다.
늘 아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했지만, 너의 방식은 아이들로부터 뭔가 좀 독특한 친구라는 마음을 들게 하는 거였다. 군중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그 마음을 너는 그때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살다보니..작은 네가 어느새.. 외로움의 깊이를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