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빛나는 너

Episode 19

by 현서린

학교 축제가 열리던 가을, 운동장에는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교실 창가마다 풍선이 매달렸고, 교복 위에는 각자 꾸며 붙인 브로치들이 반짝였다. 그해 RCY 행사는 네가 직접 기획한 “홍보 뮤지컬”이었다. 무대 대본부터 음악 개사까지 모두 네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 네가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며 연출을 맡겠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살짝 놀라며 물었지.

“너 그걸 다 혼자 할 수 있겠어?” 넌 웃으면서 대답했었다.
“혼자는 아니에요. 다 같이 하면 돼요.”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일은 네가 직접 했다. 무대 장식도, 조명 위치도, 대본 수정도, 심지어 간식 준비까지.
단원들은 너를 믿었고, 선생님은 “영서가 하면 되지.”라며 맡겼다.

그것은 네가 가진 재능의 축복이자, 깊은 고독과 창작의 고통이 시작되는 동시에 성취감을 맞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공연 전날 밤, 너는 체육관 무대 앞에 혼자 앉아 조용히 기타를 튕겼다.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손끝의 현이 가늘게 떨리며 공기를 흔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듯, 기타가 말했다.

'진짜 잘하고 싶어. 모두가 즐거워 하는 공연을 했으면 좋겠어.'

그날의 너는 어린 단장이었지만, 누구보다 완벽주의자였다. 아이들이 동선이나 대사를 틀릴까봐, 노래의 음이 맞지 않을까봐, 네 마음은 온통 긴장으로 감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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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일, 거대한 강당의 무대에 네가 서자 조명 빛이 눈부셨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었고, 너는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우리는 적십자의 사랑을 전하러 왔어요!” 그 순간, 모든 시선이 너에게 쏠렸다.

네가 쓴 노래가 스피커로 흘러나왔고, 단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군무를 추었다. 중간 중간 선생님들을 희화한 성대모사와 유머러스한 제스쳐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고, 선생님들도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관객이 된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면 그 함성 속에서 너는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웃음이 자꾸 흔들렸다. 무대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 속 어딘가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뭔가 꿈틀거리고 울렁대는 가슴이 떨리면서도 차오르는 희열 같은 무언가가 너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조명이 네 얼굴을 비췄을 때, 너는 잠깐 숨이 막혔다.

모두가 널 바라보고 있지만, 그 시선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사람들은 ‘리더 채영서’를 칭찬했지만, ‘그냥 영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이 닫힌 뒤,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환호했다. 너는 그 틈에서 살짝 벗어나 조용히 소품들과 기타를 정리하는데, 손끝에 묻은 분필가루가 어쩐지 하얀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

그때 연지가 무대 뒤로 와서 너를 찾았다 . 밝은 웃음을 보내며 말해주었다.
“영서야, 넌 진짜 대단하다. 나중에 꼭 방송국 가야겠다. 연예인 같아.”
너는 씩 웃으며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 했지만, 그 말이 네 안에서 이상하게 오래 울렸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교복 재킷에 붙은 작은 RCY 배지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건 박수보다 조용히 빛났고, 아무 말 없이 ‘수고했다’고 말하는 듯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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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영서보다 훨씬 춤을 잘 추던 혜인이와 두 친구들의 소방차 공연이었다.

훗날 어떤 연예인의 아내가 되어 종적을 감췄던 혜인이는 그 당시 우리 학교 최고의 댄싱퀸이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파리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는데, 모델이 되어도 좋았을 그 아이가 연예인과의 결혼이 아닌 직접 본인이 연예인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때의 영서는 혜인이의 숨겨진 팬이기도 했으니까.

지금도 혜인이가 어디선가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혜인이와 친해졌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담다디 공연을 한 직후에 "잘한다"며 말을 걸어주었던 혜인이가 가장 잊지 못하는 졸업앨범 속 동창이었다. 그날 밤 일기장에, 너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만,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짧게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계속 노래할 거야.”

그 문장은 마치 다짐처럼, 혹은 스스로를 붙잡는 주문처럼 너를 감싸안았다.
너는 그렇게, 박수 속의 고요를 배우며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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