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0
축제가 끝난 뒤의 학교는 쓸쓸했다.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던 풍선은 모두 바람이 빠져 운동장 위에 힘없이 누워 있었고, 네가 걸어가던 교실 복도엔 아직도 웃음소리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날의 박수는 뜨거웠고, 열정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다음 날은 아무도 축제 이야길 꺼내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수학시험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체육대회 점수를 계산했다.
너의 무대는 그렇게 하룻밤의 축제처럼 사라졌고, 신데렐라의 12시 마법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넌 손끝에 다시 두꺼운 4B연필을 잡고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사과 한 개, 빛과 그림자가 엇갈리며 둥근 표면에 생명을 입히는 순간, 너는 다시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학원에서는 네가 제일 빨리 배웠다. 원장님은 종종 말했다.
“영서야, 넌 감각이 좋아. 그림에 생기를 넣을 줄 아는 거 같군.”
그런 말들이 귀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3학년 방학이 되자 엄마가 말씀 하셨다.
“우리 영서,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아? 그럼 미술고등학교를 알아볼까?”
엄마의 그 말은 네 가슴을 또 한번 울렸다. 그런 이야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학원 선생님도 그랬고, 같은 반 친구들도 그렇게 말했다.
“넌 그냥 예고 가야지.”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너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 나는 그림 그리면서 살아야지. 그리고, 신성우처럼 락밴드도 하면서...대학 가요제에 나가야지’
그건 네 안에서 자라던 꿈의 씨앗이었고,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던 너에겐 행복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엄마와 여러 학교를 답사하고 난 후, 식탁 위에 펼쳐진 브로슈어 위로 엄마의 손이 천천히 덮였다.
“영서야… 예고가 너무 비싸네. 등록금도, 재료비도. 별도 강습비까지 다 감당하긴 우리 형편에 어려울 것 같네. 미안해서 어쩌지?”
그 말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이 칼날처럼 마음에 박혔다.
네가 그린 사과의 붉은 빛이 순식간에 색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너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가까운 학교로 갈게요. 어디든 가서 내가 열심히 그림 그리면 되죠 뭐. ”
그러나 그날 밤, 책상 위에 놓인 스케치북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덮지 못한채, 밤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연필 자국이 남은 손끝을 바라보며 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포기하진 말자. 나는 그릴 거야.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뭐.”
1991년 봄, 너는 중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그대로 진학했다.
교복은 짙은 초록빛 색이었고, 리본은 단정하게 매야 했다. 복도는 반짝였지만, 어딘가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그곳의 벽에는 너의 그림 대신 빽빽한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고, 그림 대신 문제집과 색연필 대신 각도기가 네 손에 쥐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 맨 밑에는 늘 작은 드로잉 북이 숨어 있었다.
하루는 과학시간, 몰래 책상에서 그림을 그렸다. 빛이 떨어지는 각도를 계산하듯, 책 위에 놓인 볼펜의 음영을 조심스럽게 덧칠했다. 그때 과학 선생님이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그림을 보시더니 한마디 하셨다.
“채영서, 넌 공부보다 그림이 좋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업시간에 그림만 그리면 어떡하지?”
너는 잠시 머뭇하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그림으론 밥 못 벌어 먹어.”
그 말씀에 교실이 조용해졌고, 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손끝의 연필이 뚝 하고 부러졌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문 유리에 비친 네 얼굴은 어른이 되기엔 너무 빨랐고, 어린 시절의 너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었다.
가방 속 스케치북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 안에는 네가 짬짬이 그린 그림들이 살아 있었다. 그건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그림이기도 했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흐릿한, 어딘가 미완의 사물들.
그중에서 너는 네가 그린 사과를 바라보다가 연필로 살짝 한 줄을 덧그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꿈은 이제 시작인걸.”
그 문장은 마치, 네가 네 자신에게 남긴 짧은 편지 같았다. 언젠가 다시 시작할 날을 믿는 — 작고 조용한 약속처럼 말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잘하는 것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하기 싫은 것들이 늘어갔다.
태어났을 때 고집불통이라 불리던 영서는 생각이 많아진 고등학생이 되는 순간에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었다.
'예고에 가고 싶다고 좀 더 졸라볼 걸 그랬나?'
전국대회에 나가 실기대회 1등을 했음에도 서울 한복판 8학군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내신성적을 잘 받지 못하면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고3때는 수능 1세대가 되어 최초로 한해에 수능을 2번 보는 학번이 될 것도 몰라서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던 너는 지금도 인생에서 한페이지를 통째로 지울 수 있다면 너의 고등학교 시절을 가장 지우고 싶었다 한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아직 영서 너의 중학교 이야기가 더 남아있기에.. 고등학교 이야기는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