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벗과 슬픈 풋사랑

Episode 21

by 현서린

1990년 그해 봄, 너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학교에선 그림을 덮어야 했지만, 주일마다 교회에선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니까.
교회 지하 예배당, 별도의 건물에 있었던 교육관, 골방같은 기도실, 도서관보다 조용한 학습관, 카페와 식당등 교회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던 공간이자, 행복한 아지트였다.
기타 줄의 진동이 벽에 부딪히며 퍼져나가는 소리. 피아노 선율에 맞춰 같이 연주하며 만들어 내는 하모니.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무대였던 것 같다. 그때 찬양팀에는 너와 동갑인 남학생들이 몇 있었다.

윤준우, 이현섭, 이준현, 김건욱.
네가 유일한 여자였고, 그래서 늘 중심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외딴 섬 같았다.
남자아이들 틈에서 웃으며 장난치다가도 문득, 네 웃음소리가 너무 높게 울려 퍼지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지. 준우는 늘 네 옆에 있었다. 기타 줄을 갈아 끼우다 잘못해서 손가락이 아플때면

“줘 봐, 이건 이렇게 해야지.”

하며 능숙하게 네 기타를 고쳐주던 친구.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항상 네 말에 귀 기울이던 친구.

음악에 누구보다 열정이 있었고, 좋아하는 뮤지션이 같아서 나누는 대화가 항상 즐거웠던 친구사이.

똑똑하지만, 잘난척 하지 않고, 늘 겸손하고 나이답지 않게 의젓했던 친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 — 지금도 네 마음 속에서 ‘한결같음’의 얼굴로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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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지금도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서로의 가정이 화목하기를 소원하고 축복해주는 사이. 누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던가?

물론 동성과의 우정과는 조금은 다른 감정이라는 생각은 든다. 배려와 사람다움이 묻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그 마음은 우정의 마음보다 조금 더 성숙한 인성이 있어야 가능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영서에게는 정말 좋은 친구가 성별과 상관없이 여럿 존재하고 있다.

세상을 살면서 단 한명의 친구만 있어도 인생을 잘 살아 온거라 했던가? 그런면에서는 영서는 이미 성공한 삶을 살아온 거 같다. 물론 오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인연이 훨씬 많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을 가진 친한 벗... 그래. 친구라는 말보다 벗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 중 준우는 정말 괜찮은 친구다. 영서가 마음을 다치는 일이 있을때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고 장난스럽지만, 아프지 않게 위로해 주던 아이.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느끼도록 해주던 아이.

영서의 핸드폰에는 그래서 '좋은 친구 준우' 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사려깊은 아이.


하지만, 그때 네가 몰래 가슴에 담아두었던 아이는 건욱이었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좋아해 본 것이 하필이면 건욱이 였는지. 그 아이는 큰 눈에 눈썹이 짙고, 각 진 얼굴형에 말투가 건조해서 전형적인 나쁜 남자 스타일로 냉정했던 아이. 항상 무표정했고, 너에게만 유난히 더 쌀쌀맞았다. 물론 너한테만 그랬을 수 도 있다.
“그 노래 네 키로는 높아. 절대 못 할 걸.”
“그림 말고 노래나 연습해. 목소리는 낮아서 남자같아서...”

"네가 그러고도 여자냐? 사우나 가서 확인해 봐야 하는거 아냐?"
툭툭 내뱉는 말들이 늘 너를 다치게 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끌렸다고 했던거 같다.

네가 왜 그 애를 좋아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 그냥 외모를 맘에 들어했던 건지.. 그냥 그 시절 나쁜 남자에게 끌렸던 건지.
어쩌면, 너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더 오래 마음이 머무는 그런 나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건욱이는 리허설이 끝나면 늘 먼저 나갔고, 너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자신도 모르게 기타 줄을 세게 튕겼다. 그 소리가 마치 “나 좀 봐줘” 하는 마음 같았었다.

찬양 연습이 끝나고, 네가 부르던 노래의 마지막 음이 공중에 남았을 때, 건욱이가 기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음정 나갔어. 진짜 연습은 제대로 한거냐? ”

그 말에 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달려 들었더니, 세상에 본인이 신고 있던 실내 슬리퍼를 휘두르며 영서를 쫓아내듯 '훠이~훠이~'하던 건욱이의 모습은 영서를 전혀 여자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안중에도 두지 않고 괴롭히는 못된 사내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 애가 교회 문을 나서며 잠깐 뒤돌아봤던 순간 — 그 한 번의 눈빛이, 너에겐 세상 전부였었다. 그리고, 그 시절 매일같이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속상해 하고, 가슴 아파하던 이야기를 노랫말로 그리고 소설로 풀어내기도 했었다. 그 사랑은 아무 말도, 아무 시작도 없이 그렇게 오래 몇 년을 갔다. 기약없는 약속을 혼자 하고 기다리기도 하고, 진지하게 편지로 고백을 해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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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욱이가 좋아하던 청순가련한 김지영. 그 아이를 맘에 둔 건욱이는 본인을 좋아한다는 영서를 어떻게든 떼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누군가 “건욱이 영국 갔다더라” 말했을 때,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지만, 그날 밤, 아무 이유 없이 노트를 덮고 오래 누워 있었다. 설명할 수도 없는 공허함이 가슴에 남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없어지니, 그 빈자리를 너의 다른 친구들이 더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별 말이 없어도 네가 힘든 걸 제일 먼저 알아채던 친구.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으며, 생일도 기억하며 챙기는 친구. 네 옆에서 ‘지나간 시절의 증인’처럼 존재했다. 물론 한동안 연락이 끊기고 살아온 시간도 존재했다마는...


그 찬양팀에는 또 한 명의 친구, 현섭이도 있었다.
키는 작지만, 유쾌하고 단정했던 아이. 언제나 부드럽고 점잖아서, ‘현섭이는 나중에 의사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 정말로, 지금은 연예인들도 다닌다는 성형외과 원장님이 되었다지. 시간은 그렇게 흘러도, 그 시절의 그의 미소는 아직도 그대로 떠오른다. 좋은 친구였는데.. 준우만큼 편하게 만나기가 쉽지 않아 그저 SNS로만 짧은 인삿말로 소통할 뿐이었다. 그리고 준현이. 네 눈에는 언제나 “너무 큰 아이”로만 보였던 친구.

또래보다 훨씬 컸던 그는 늘 연장자로 보여서 오히려 가까이 말 몇마디 붙여보지 않은 어쩌면, 그 중 가장 순수했던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식은 19살이 넘은 그 후로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조용히 찬양팀에서 연습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찬양팀에 여자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키는 작고 까만 피부의 그 선생님은 찬양팀에 들어오자 마자, 영서 너를 내보냈다.

“팀에 여학생은 그만 나와야겠어요.”
짧은 통보 한마디. 그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너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기타를 벽에 세워두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찬양팀에서 강제로 밀려나듯 나간 이후, 얼마후에 비중격만곡증 수술을 받게 되는 바람에 자연히 넌 찬양팀 친구들과도 멀어져 교회에도 한동안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수술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고, 병원에 생각보다 오래 있게 되어 문병을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결국 넌 친구들을 한명도 보지 못했다. 출혈이 심해서 환자복이 피로 물들어 기절 직전까지 갔을때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너무 놀라서 그냥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회복을 하고 돌아간 교회에서 네가 잊혀져 가고 있었다는 마음이 들자, 걷잡을 수 없이 사람에 대한 실망과 믿음에 대한 시험이 같이 다가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래부르고, 좋아하는 친구들 때문에 교회에 다녔던 것이 아니었는지 네 마음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또.. 성장을 위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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