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냄새, 무대위 춤추는 손가락

Episode 22

by 현서린

1990년 그해 여름, 너는 수술로 인해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다.

노래를 부르던 예배당도, 기타를 치던 연습실도, 준우와 머리를 맞대고 코드를 맞추던 그 따뜻한 교육관도, 너 없이도 잘 돌아가는 듯 보였다.

회복 후 처음으로 교회 문을 열던 날, 너는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뒤바뀐 온도를 느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네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빈 의자처럼 오래도록 비워져 있었다.

찬양팀 연습이 들리는 예배당을 지나도 아무도 너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잃어버린 무대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너를 다시 찾아낸 사람은 찬양팀이 아니라 주보사(週報社) 담당 집사님이었다.

“영서야, 너…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쓴다며? 주보 편집 좀 도와줄래?”

그 말은 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꺼져 있던 불을 조용히 다시 켜는 소리였다.

찬양팀에서 내보내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이번엔 누군가에게 네가 필요하다는 부름이었다.

너는 조심스럽게 그 작은 방 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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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사는 예배당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과 달리 작은 형광등이 켜진 좁고 어두운 방이었다.

늘어진 전기선, 종이가 쌓인 선반, 색색의 가위와 풀, 오래 묵은 잉크 냄새.

그리고.. 어쩐지 따뜻한 종이 냄새.

그 방의 공기는 기타 소리 대신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아, 왔구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혁! 주보사의 상징같은 선배오빠

그는 1974년생, 너보다 한 살 많았고 키가 크고 훤칠하면서도 표정은 차갑기보다 따뜻했다. 웃을 때면 눈꼬리가 반달처럼 내려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재혁 오빠”라고 불렀다.

그가 책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영서야, 찬양팀 안 하게 됐다며? 유일한 여성 기타리스트 였는데, 그동안 멋있었다. 여긴 음악은 있지만, 직접 부르진 않아도 돼. 대신… 네 마음을 그리거나, 글로 풀어주면 되거든.”

그 말은 어떤 위로보다 더 음악 같았다. 너는 잉크 냄새가 나는 새로운 무대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 무대에서, 너는 기타 대신 펜으로 춤추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너에게 재혁 오빠가 웃으며 답했다.

“영서는 뭐든 진심으로 하잖아. 그럼 됐지.”

그 말이 낡은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울렸다.


아가페 문집의 시작 -

주보사는 매주 주일 예배가 끝나면 분주해졌다. 다음 주의 주보를 이번 주부터 준비하는 법.

각 부서의 소식, 행사 사진, 기도 제목들 사이에서 너는 삽화와 레이아웃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책상 위에 오래된 문집 한 권이 놓였다.

약간 바랜 미색의 표지, 손때가 묻은 종이, 구석엔 연필로 쓴 듯한 필기체 글자『아가페』

“이거, 다음 호부터 네가 같이 꾸미면 좋겠다.”

재혁 오빠의 말에 네 손끝이 아주 예민하게 떨렸다.

종이를 넘기던 순간, [글]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네가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래 대신 문장으로 마음을 채우고, 스케치 대신 레이아웃으로 감정을 배치하며, 기타 대신 펜과 가위, 풀로 조용한 하모니를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은 너의 상처 난 마음을 다시 봉합하는 은밀한 치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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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마감 날, 늦게까지 남아 작업을 마무리했다. 형광등 아래서 스테이플러 소리가 딱딱 울리고, 재혁 오빠는 종이를 접고, 젠틀하게 웃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영서야, 네가 만든 페이지는 다른 아이들이 제일 좋아해.”

너는 그 칭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얼굴이 발그레 열이 오르며 그저 “아… 그런가요…” 하고 웃었다.

재혁 오빠의 칭찬은 이상하게 건욱이의 눈빛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았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조용하고, 더 깊은… 연장자에게 처음으로 인정받는 '따뜻한 감정'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무대를 떠난 것이 아니라 네가 서 있던 무대가 바뀐 것 뿐이었다.

예배당에서는 기타를 내려놓았지만, 주보사에서는 펜을 들었고 아가페에서는 마음을 펼쳤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세상과 사람들은 알게 된다.
나이 답지 않게 젠틀하고 매너있던 재혁 오빠가 배우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유명하고 재미있었던 그 영화에 재혁오빠가 생각도 못했던 역할로 등장을 했을 땐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놀랐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하며 말했다.

"역시 세상이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군!"

'그때 그 재혁오빠가 영화배우가 되었다니.. 너무 멋지네.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

그 웃음, 그 눈빛. 그 따뜻함. 배역과는 딴판인 원래의 재혁오빠의 모습을 아는 넌 연기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신기하고 놀라웠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에 더빙도 잘할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더빙도 잘하잖아?

지금도 훌륭한 배우로 인정받는 그를 생각하면 너는 가끔 주보사에서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하며 웃었던 재혁오빠의 그 미소가 생각이 난다고 했다. TV와 영화에서 좀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재혁 오빠의 연기 생활이 탄탄하기를 같이 기도해 본다. 근데 그 오빠는 여전히 교회는 다니고 있을까? 그건 짧았지만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남은 인연이었다.

노래가 아니어도, 너는 여전히 무대에 있었다. 기타 줄을 대신한 것은 펜이었고, 조명을 대신한 것은 창문을 비추던 햇살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방에서 너는 알게 되었다.

“표현할 수 있는 일들을 나는 정말 너무 사랑해.”
“노래가 사라져도, 그 어떤 종류의 예술이 언제든 내 안에서 계속 꿈틀거리고 숨쉬고 있어.”

결국은 예술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고 했던가?

너의 그러한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나의 기쁜 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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