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서점의 토끼 채영서

Episode 23

by 현서린

중학교 2학년 2학기, 너는 생애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은 공장에서 시작되지도, 식당의 뜨거운 불 앞에서 시작되지도 않았다.

너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 바로 동네 한양스토어 정면에 위치하고 있던 한양서점이었다.

늘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풍기던 종이 냄새와 조금은 오래된 쾌쾌하지만 싫지 않은 책 먼지 냄새가 섞여 있던 공간. 너는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책을 사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책장 사이에 서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장님은 거의 매일 찾아오는 너를 기억했고,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은근히 즐기셨다.

책장사이를 오가며 잘못 꽂힌 책을 제자리에 찾아 꽂는 다거나, 누군가 책을 찾으면 사장님보다 먼저 뛰어가 책을 찾아준다거나, 월간지에 딸려오는 부록이 어떤 건지 바로 알려드리는 너의 순발력에 가끔 입을 벌리고 감탄하곤 하셨다. 이쪽저쪽을 빠르게 옮겨 다니는 모습이 필요한 책을 찾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어디에 뭐가 꽂혀 있는지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었다.

“넌 꼭 책에 나오는 그 이상한 토끼 같다.” 사장님은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앨리스 같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장님은 누군가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는 앨리스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누군가를 이상한 나라로 끌어 당기는 토끼 같다고 영서를 표현하고 계셨다.

"히히 사실 제 띠가 토끼띠이긴 해요. "

생각없는 듯 웃으며 이야기 했지만, 그 말은 싫지 않았다.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책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야기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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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며
“영서야, 잠깐 가게 좀 봐줄래?” 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서점은 더이상 너에게 그냥 ‘머무는 장소’가 아닌 ‘일하는 장소’가 되었다.

손님이 책을 고르며 망설일 때면 너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놓지도 않았다.

“이건 읽어보시면 오래 기억이 남아요.”
“이 작가는 감정선을 잘 써요.”
“이 책은 지금 읽기 좋아요.”

짧고 정확한 말. 마치 책 속에서 중요한 문장만 골라 툭 꺼내 놓는 것처럼.

사장님은 그래서 ‘베스트 셀러 찾아내는 영서’라고 불렀지만, 너는 그저 네가 읽은 것을 내보내는 일이 즐거웠을 뿐이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아는 것을 혼자만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친구들과 역활놀이를 하며 놀때도 선생님 역할만을 고집했었지. 읽고,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알게 된 것을 말해주는 걸 참지 못해 꼭 무언가를 건네줘야 하는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그리고, 설명하는 순간 그 내용이 비로소 진짜 자기 것이 되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점에서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지만, 여유도 있었다. 그래도 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책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고르고, 사람을 보고, 말을 고르고 있었다.

시급은 1200원. 그 숫자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세계에서 내 방식으로 움직여도 괜찮다’는 감각이었다.


서점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던 아이들 -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들이었다. 그중 유독 자주 보이던 아이들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이윤형, 김선우, 신이수

셋은 항상 같이 움직였다. 교복 차림으로, 사복차림으로 자주 드나들었다.

책장 사이를 배회하다가 결국 계산대 근처에서 너를 불렀다.

“누나, 이번주에 새로 나온 책이 뭐예요?”
“누나, 지난번에 말해준 책이랑 비슷한 거 또 있어요?”

처음 남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듣고 흠칫 놀랐었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자중학교에 다니던 네가 만날 수 있었던 남학생들은 교회를 같이 다니는 동갑인 찬양팀 친구들 뿐이었는데, 이 아이들은 서점이라는 중간 지대에서 자연스럽게 자주 말을 걸어왔다.

나중에 친해진 다음에 알았지만, 영서 너를 대학생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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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들이 몇 살인지 알고 있던 너는 동생 채민혁보다 한 살 많다는 사실도 묘한 거리감을 만들었다.
동생 같기도 했고, 그렇다고 완전히 어린아이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대화는 잘 통했다.

네가 추천한 책을 전혀 의심 없이 받아 들고 사갔다.

셋은 늘 서로 다른 책을 샀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와서 말했다.

“누나, 이거 바꿔 읽었어요.”
“이건 윤형이 스타일이고, 이건 선우가 좋아할 것 같고, 이건… 이수 거야.”

책은 그렇게 세 사람 사이를 돌고 돌았다. 너는 그 광경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책을 건네고, 그 책이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과정. 이야기가 사람을 옮겨 다니는 모습.

서점에서의 너는 책을 파는 사람이기보다 이야기의 길을 잠시 열어주는 존재에 가까웠다.

사장님이 말하던 ‘이상한 토끼’라는 표현이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알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따라 들어가는 앨리스가 아니라, 책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이끌던 이상한 서점에 있는 이상한 토끼쪽에 더 가까웠으니까.

서점의 오후는 늘 부산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절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연결이 오래 남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서점 아르바이트는 중3이 되면서 일주일에 2번으로 줄어들었고, 중3 2학기에 멈추게 되었다.

3인방을 다시 만나게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음악을 좋아하던 네가 집 앞 레코드점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이야기도 잠시 뒤로 미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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