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4
중학교 시절의 너에게 밤은 단순히 하루의 끝이 아니었다.
그건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는 시간, 아무도 너를 부르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절, 너는 만화를 엄청 많이 읽어댔다.
방 한쪽에 쌓여 있던 만화책들은 더이상 책장에 꽂힐만한 자리가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가구가 되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두툼한 요를 깔았다. 책의 높이가 다 고르지 않아 몸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이 가장 안정적인 자리였다.
너는 그걸 침대라고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비밀침대였다.
친구들이 놀러와서 진짜 침대인줄 알고 앉았다가 침대 특유의 울렁거림이 느껴지지 않으면 놀라서 눈이 커졌고, 비밀침대의 비밀을 알게 되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시절 영서의 방에 찾아왔던 친구들은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못해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시절 비밀 만화침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곤 했다.
르네상스, 댕기, 윙크, 하이센스, 파티부터 국내에 발행되던 순정만화 잡지는 창간호부터 거의 빠짐없이 있었다. 일본만화인 슬램덩크나 시티헌터 같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영서 너는 국내 순정만화들을 더 좋아했다.
강경옥과 김진의 세계에서 감정의 깊이를 배웠고, 신일숙과 김혜린의 서사에서 인물의 시간을 읽었고,
황미나와 원수연의 그림 속에서는 말보다 강한 침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던 작가는 원수연.
그래서 그녀의 만화를 가장 많이 따라 그렸다. 한동안은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만화는 너에게 단순한 유흥이나 오락이 아니었다.
그건 살아있는 그림이자 숨쉬는 소설이었고, 리듬과 시가 함께 흐르는 종합 예술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장면이 움직였고, 칸과 칸 사이에서 이야기는 스스로 호흡했다.
순정 만화는 네게 마치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이 읽혀졌고, 무대위의 연극을 보는 듯한 착각속에 빠지게 해주었다. 음악까지 곁들이면 네가 가장 좋아하는 세계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서점 아르바이트로 벌던 시급 1200원. 하루에 4시간 4800원. 한달에 10만원이 안되는 돈이었지만, 결국 그 세계를 몇 년이나 지속시켜 주는 연료가 되었었다.
너는 돈을 모아 옷을 사기보다 책을 샀고, 책을 사기 위해 또 다시 일을 했다.
그렇게 모은 만화책 위에 누워 있으면 천장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이야기들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학교에서의 말들,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 조용히 삼켜야 했던 순간들은 그 위에서 잠시 힘을 잃었다.
그 침대는 도피처였지만, 동시에 훈련장이기도 했다.
너는 그 위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서 멈추고, 왜 다시 움직이는지를 배웠다.
나중에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그 엄청난 양의 만화책들을 헐값에 넘기게 되었을 때도 너는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10년 이상을 모으고 아끼고 읽었던 너의 애장품과 소장품들은 TV에 출연해 알게 되었던 영서 너와 동갑인 남자분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 남자분은 거의 전재산을 순정만화에 투자하던 사람이었다. 나름 너의 보물이었던 그 책들을 그저 중고서점이나 고물상에 가치없이 폐품으로 버릴 수는 없었던 너는...
방송에 나와서 진솔하게 순정만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던 그 사람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고, 34개의 커다란 박스에 손수 만화책들을 정성스레 포장을 하고 20만원이라는 거금의 택배비를 들여서 그 수집가의 만화창고로 네 보물들을 떠나 보낸것은 그 분이 언젠가 만화책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 박물관의 평생 이용권을 주겠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약속을 떠올리면 웃게 된다고 말한다.
아직 그 박물관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걱정되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책이 아니라, 그 책들 위에서 버텨낸 시간이었다는 걸 너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너의 비밀스런 침대를 알고 있는 몇명의 친구들은 그때의 너를 기억할까?
그때 그시절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던 영서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 시절의 너는 현실보다 네 상상속의 이야기에 더 정확하게 숨 쉬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숨결은,
이후의 모든 선택 - 그림으로, 글로, 무대로 향하던 너의 방향을 이미 조용히 결정하고 있었다.
만화책이 만든 비밀침대 위에서 너는 세상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이야기를 떠나지 않는 법을 먼저 익혔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건 분명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