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비도덕 사이의 아이러니

Episode 26

by 현서린

1991년 시린 봄, 사립여고의 교문을 처음 지나던 순간을 너는 아직도 기억한다.

하늘은 환하게 열려 있었지만, 학교의 공기는 어쩐지 묵직했다. 새 교복의 풀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교정은 유난히 조용했다.
누구도 큰 소리로 웃지 않았고, 누군가의 눈빛은 너를 스쳐 지나가듯 훑었다. 돈이 말하는 구조가 보이지 않는 벽처럼 세워져 있는 세계—그런 느낌이었다.

교실에 들어선 너는 아이들의 작은 차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가방의 브랜드, 손목에 채워진 시계, 새 교복의 윤기, 맞춤 교정구로 가지런한 치아, 부모의 직업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어투. 친구들은 그것을 ‘당연한 풍경’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너에게는 낯선 상징처럼 느껴졌다.

첫 시간, 담임 겸 도덕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다. 목소리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단단함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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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을까 반 아이들과 1:1로 돌아가며 담임이 상담을 시작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키가 큰 탓에 뒷번호에 머물던 너는 상담일이 가장 마지막 날이었다. 네 순서가 되어 상담실로 들어서자, 차가운 인상도 따뜻한 인상도 아닌, ‘판단을 보류한 얼굴’로 도덕 선생님인 담임이 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학생기록부에서 ‘미술’을 하고 있는 네가 '미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본 순간, 담임의 눈빛이 잠깐 번쩍였다.

그 짧은 번쩍임이, 이후 1년간 네 삶을 어떻게 가둘지 그 당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채영서 학생, 부모님께 말씀 좀 드릴래? 우리 학교는 발전기금과 육성회비를 조금씩 참여하고 있거든. 미술을 하는 친구들은 대개 집도… 여유가 있으니까.”

미술을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집안도 여유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추론이 내려져 있었다.

너는 순간 그 말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선생님은 이미 너를 ‘어떤 계급’에 배치해 둔 것처럼... 그 말은 조용했지만, 은근한 압박의 결을 품고 있었다.

너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선생님! 부모님께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너의 그 말에 선생님의 표정은 굳어졌고, 그 굳음은 마치 하루짜리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많은 날들의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의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끄덕임 속에는 이해가 아닌 실망이 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학교생활은 작은 균열들을 만들어냈다. 활동조를 정할 때 너는 늘 마지막까지 남았고, 조별 발표에서 네 의견은 투명인간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침 조회에서 이유 없는 지적을 몇 번이나 받았다.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결론을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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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시간마다 선생님은 정직, 정의, 배려를 말했지만, 그 말들은 이상하리만치 허공에서 울렸다.

너를 향해선 단 한 번도 실천되지 않았으니까. 아이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예고 진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현실만으로도 엄마는 자신을 얼마나 탓하셨을까? 그런 엄마에게 “돈 때문에 학교에서 차별받는다”고 이야기한다는 건 너에게는 잔혹한 일이었다. 엄마는 늘 최선을 다해 너를 키웠고, 너는 엄마의 마음에 기계 하나라도 더 얹히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그날 집 앞 골목에서 너는 가방을 끌어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문고리를 잡기 전, 숨을 한 번 깊게 삼켜야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 안에서는 언제나 너는 “괜찮은 아이, 묵묵히 버티는 큰 딸” 이여야 했으니까.

도덕 시간마다 전해지는 도덕과 비도덕 사이의 아이러니, 네가 느낀 것은 ‘말’이 아닌 ‘부재’였다.
가르치는 도덕과 행하는 비도덕 사이의 깊은 아이러니.
네가 가장 먼저 배운 학교의 교훈은 도덕이 아니라, 도덕의 결핍이었다.

너는 그 시절을 ‘조용한 차별의 계절’이라고 기억한다. 아무도 크게 소리내어 상처를 주지 않았지만, 아무도 상처를 막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의심, 작은 무시, 작은 제외들이 너를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그때 깨닫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서 네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차별 아래에서도 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씨앗 하나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주 조용히, 아주 천천히—
너는 그 차별의 계절을 지나 새로운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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