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지만, 멈추지 못했어

Episode 36

by 현서린

처음은 별거 아닌 것처럼 시작됐다.

아니, 그렇게 보이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학기 초, 너에게 먼저 다가온 아이가 있었다.

선라은. 그 아이는 이유 없이 친절했다.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말을 걸었고,
굳이 옆에 앉지 않아도 될 자리에 앉았다.

너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고, 묻는 순간 깨질 것 같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였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자리처럼.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시선이 달라졌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줄어들고, 웃음이 어색해지고, 자리가 비워지기 시작했다.

라은이는 여전히 너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반 아이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반 전체가 너를 외면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라은이는 끝까지 너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더 잔인한 방식이었다.

너를 돕지 않으면서,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 것.

아이들이 없을 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영서 너랑 말을 섞으면 나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미안해 영서야."

그때부터였을까.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건.

결국 너는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힘든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절대로 꺼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유를 찾았다.

더 설명하기 쉽고, 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

성적.

“엄마… 나, 학교 그만두면 안 될까.”

말을 꺼낸 순간,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허락을 구하는 형태의 포기라는 걸.

“갑자기 왜?”

짧은 질문이 돌아왔다. 너는 잠깐 멈췄다가,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성적이…좀 걱정이 되서.. 너무 힘들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1학기 중간고사는 모두에게 어려웠다. 아이들 대부분이 점수가 낮았고, 그래서 평균도 많이 낮았다.

그래서 1학기 중간고사 성적 등급은 괜찮았다.

하지만 기말고사는 달랐다.
선생님들이 낮은 평균을 고려하여 자율학습에 사용하는 문제집에서 그대로 출제를 했고, 아이들의 점수는 전부 올라갔다.

오직 영서 너만, 그 시험을 보지 못했다.

기말고사 기간에 병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 점수의 70%로 대체되었고,

너의 등급은 한 번에 다섯 단계가 떨어졌다.

게다가 그 시기는 더 잔인했다. 처음으로 수능이 도입된 해. 1993년.

모든 기준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신은 1학년 20%, 2학년 30%, 3학년 50%. 반영

1, 2학년 성적으로는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3학년 성적이 망가지면 되돌릴 수 없었다.

그 시기에 너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수능 1차 시험조차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건데?”

엄마의 목소리는 한숨과 함께 짧았다.

그냥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알게 된다. 이제는 버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너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

“나 자퇴하고 검정고시 보면… 안 될까.”

잠깐의 침묵.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중졸 학력으로는 아무것도 못해. 검정고시는 검정고시 일 뿐이야.”

그 한마디로 모든 가능성이 닫혔다.

너는 알고 있었다.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엄마에게 ‘중졸’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더 말할 수도 있었다.

너에게 일어난 이야기. 교실에서의 일들. 그 시선들. 차가운 적막감과 외로움.

네가 왜 병원보다 학교가 더 두려웠는지.

어렵게 말을 했지만, 너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너는 말했지만, 결국 멈추지 못했다.

너에게 일어나는 악몽같은 시간들을...

그리고 알게 된다.

이제부터는 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거라는 걸.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인지, 너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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