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눈치’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배웠다.
윗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부당한 지시에도 맞춰야 했다. 그게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버텨내는 것이 곧 성장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스스로를 깎으며 조직에 맞추어 갔다.
그렇게 십 년을 버티다 보니, 내 마음은 어느새 닳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분위기,
늘 쏟아질지 모르는 지적을 예감하며 긴장하던 순간, 퇴근 후에도 머릿속은 늘 회사에 붙잡혀 있다.
잘못한 게 없어도 스스로를 의심했고, 늘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쉴 틈이 없다.
개인의 삶에서는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안 만나면 그만이다. 갈등이 생기면 거리를 두면 된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다르다.
어제 업무로 크게 부딪힌 사람과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인사한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가 평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웃으며 지내는 관계는 겉으로는 매끄러워 보여도, 속으로는 더 깊은 피로를 남긴다.
그 와중에 내 밑으로 들어오는 후배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기 의견을 거리낌 없이 말했고,
상사들은 오히려 눈치를 보며 맞춰준다.
“나는 왜 웃으며 버텨야 했는데, 후배들은 존중받을까?” 같은 공간에서 세대마다 사회생활의 규칙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결국 깨달았다.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직장이라는 공간 자체였다.
직장 속 인간관계는 늘,
겉으로 웃으며 어울리는 것과 속으로 나를 붙드는 것 사이의 줄타기다.
타협과 순응, 동시에 자존감과 나만의 원칙.
그 둘을 동시에 품어야 하는 10년 차 중간 세대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버겁다.
직장 내 인간관계는 결국,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다.
좋아하는 사람만 만날 수 없고,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도 프로답게 웃으며 대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은 내게 늘 모순적이고, 동시에 냉혹하다.
결국엔 이 모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놓고, 웃어야 할 땐 웃되 내 감정까지 속이지 않고, 조직 내에서 챙길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찾아 챙기면서, 회사 밖에서의 나의 성장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