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독서] 폴 칼라니시 - 숨결이 바람 될 때
6.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대에게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2019.05.21
출퇴근 길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책을 읽고 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삶을 경건하게 대하도록 만든다. 그러다가도 실제 그 죽음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만나게 될 때, 생(生)에 대한 감각은 생생해진다.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와 남은 생애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은 중력이 되어, 두 발을 딛고 현실을 살아내도록 만든다. 누군가에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오늘을.
이번 글은 폴 칼라니시의 <When breath becomes air: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작성한 감상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죽음이 산 사람을 살려내고 산 사람이 죽음을 기억하여, 고인을 되살려내는 생명력을 느끼기 좋은 오월의 밤, 바람과 함께.
제목 : 바람이 숨결임을 알게 될 때, 무한의 거리는 유한하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언제나 재미가 없었다. 좀 더 높은 학점이 자신의 미래를 낫게 해 줄 것이라는 각자의 바람은 이산화탄소 가득한 도서관 열람실과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내겐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내 삶의 호흡을 채우는 또 다른 공기인 스마트폰을 켰다. 도서관 밖의 바람은 차가웠다. 친구의 소식은 서늘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뇌사 상태라고 했다. 주어진 사실을 전하는 친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갑작스러운 ‘사실’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의지가 목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결은 바람이었다. 살랑살랑 느껴지는 바람에는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친구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 바람은 무거웠다. 한 번의 숨으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시험공부에 한숨을 몰아쉬던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음날 아침의 햇살은 유달리 따뜻했다. 공부가 되지 않는 핑곗거리를 찾는 것도 잠시, 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던 참이다. 어젯밤 친구를 위해 이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추천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꿈을 얘기했다. 장례식장에 모인 고등학교 동창들은 각자의 미래를 말하며 어둠을 밀어냈다. 상주에게 드리우는 공기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나는 끊임없이 얘기했다. 누군가의 삶이 정지된 시점에서 산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장례식장의 북적한 분위기는 그들을 위한 응원가처럼 들리기도 했다.
“시간 너머의 시간을 꿈꾸며 시간을 채우는 마음은 내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라는 한 독자의 추천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가가 말했던 ‘환자 가족들에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환자가 어떤 미래를 원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했던 시간의 모순’을 나는 직시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시 몸을 뉘었을 때, 친구는 죽음을 마주하며 행복을 떠올렸다. 장례식장에 피어오르는 향들이 유년시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듯했다. 그가 감당할 질문의 고통을 가늠하지 못한 채 나는 물었다.
“어때? 괜찮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 엄마와 행복했던 시간들만 자꾸 생각나.”
친구는 그동안의 추억들로 현재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 순간의 현실이 너무나 무겁기에 과거를 끌어 모아 두발로 버텨낸다. 삶을 살아낸다. 조문객의 슬픔을 무표정으로, 모든 감정을 흡수해낸다. 야속한 기억들이 장례식장에 위치한 허름한 소파를 휘감는다. 나는 작가의 표현처럼 분노와 슬픔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 6개월 사이로 어머니를 잃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해서 부모님을 호강시키겠다는 보통의, 평범한 꿈은 한 줌의 바람으로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다.
김훈의 말처럼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지만, 슬픔을 마주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새벽의 바람은 거셌다. 변화의 바람이 흔적을 밀어내고 있었다. 운구할 때의 맞는 바람은 서늘했다. 화장 절차를 진행하는 상조 직원들은 개별적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해부실에서 시체를 보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던 작가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했던 죽음들이 유족들에게 구체적 현실이 되었을 때, 그들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납골당은 '가족공원'이라는 다소 어색한 이름으로 모순된 광경을 자아냈다. 어른들과 같이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은 따뜻했다. 운구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지하철은 일상의 황홀함을 깨우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보였다. 무표정에 감춰진 삶 자체의 행복이 느껴졌다. 일상의 예술이란 이런 것일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이 작가가 의사가 되기 위해 가슴속에 새겨야 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중첩되니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다. 사람의 목숨을 치열하게 구하려 했던 한 의사의 절실했던 삶의 관조는 죽음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을 너무나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애절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리를 스치는 바람이 누군가의 숨결임을 깨달을 때, 무한의 거리는 유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