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강릉, 사람을 부르는 겨울이야기(下)

23. 여행이라는 산소, 강릉이라는 성소(聖所)

by AND ONE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강릉은 성소(聖所)다. 흔히 통용되는 '성지'(성지 순례의 그것)의 의미와는 다르게 종교적 이유는 없다. 감각의 문제다. 2012년 겨울의 첫 내일로 여행지로서,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군 복무지로서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감각이 되었다. 2019년의 여름과 겨울은 경포대와 오죽헌보다 커피와 맥주, 재즈와 책이라는 명사가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강릉은 여행지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 이 역시 감각의 문제다. 감각은 신체를 통해 주변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흔히 여행에서 만난 사람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 특유의 들뜬 감정은 좋은 기분이 기본이 되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적인가 아님 여행적인가. 여행적인 나는 현실적인가.


정체성의 문제다. 숙소 아래 LP바에서 드럼과 장구를 미친 듯이 두드리는 두 명의 중년 남성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일상에서의 나와 여행지에서의 내가 다르다면, 어느 게 진짜 나인 것일까? 다른 삶,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겠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친구를 초대해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며 특별한 근심 걱정 없이(물론 있겠지만) 사는 삶 - 을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가?


취향의 문제다.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다. 마음을 취하는 것이며 무언가에 취하는 것이다. 즐기는 걸 생계의 수단으로 전환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인생의 재미, 그 순수한 느낌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불안할까, 어쩌면 29살이 되어가는 마당에 제대로 된 취향조차 갖지 못한 인간이 아닐까라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시공간의 문제다. 특정 시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취향이 만들어진다. 시간의 총량은 하루 24시간으로 같다. 결국 개인의 차이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는 결국 '어디에 있느냐'와 같은 말이다. 즉,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은 곧 시간의 이동이고,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곧 여행이 된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 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지금의 나 자신이, 행위 그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시간이 있을 땐 돈이 부족했고, 돈이 있을 땐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성소(聖所)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다시 서울에서 강릉으로, 여름에서 겨울로.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이동한다. 여행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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